2024. 03. 24.(종려주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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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4-03-22 12:02
조회
787
제목: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4)
성경: 마태복음 21: 1- 11
1
교회력에 맞추어 설교를 준비하다보면 가장 어려운 설교가 “종려주일” 설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 속에 성탄절, 여러 무대 위에 다양한 분들이 등장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오고, 요셉의 꿈속에서 아기 예수님의 이름이 지어집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를 드리고, 성탄의 기쁜 소식이 목자들에게 전해지면서 천군천사들의 찬송이 베들레헴 들녘에 울려 퍼집니다. 그 중에 하나를 본문으로 택하여 성탄절 설교를 준비하면 됩니다.
부활절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 속에는 부활절 이야기가 여러 토막 담겨 있습니다. 부활절 새벽 열린 무덤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절 오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부활절 밤 두려움으로 채워진 다락방에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시고, 여드레 후 도마는 주님의 못 자국 난 손을 보면서 아름다운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은 지친 제자들을 위하여 갈릴리 호숫가에다 숯불을 피워 조반을 준비하십니다. 그 중에 한 장면을 본문을 택하여 부활절 설교를 준비하면 됩니다.
종려주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종려주일 이야기가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지만 내용은 하나같습니다. 종려주일이 펼쳐지는 무대도, 등장하는 인물도, 장식도어 있는 소품도, 이야기의 줄거리도 하나같습니다. 그러니 종려주일이 돌아올 때마다 본문의 내용이 같을 수밖에 없는데요, 그 날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저와 함께 달려가 보십시다.
2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무신 주님께서 “벳바게”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맞은 편 마을로 가보라.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가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 끌고 오너라. 혹시 주인이 나와서 ‘왜 남의 나귀를 끌어가는 거요?’라고 말하거든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그러면 즐거운 마음으로 내어줄 것이다.”
나귀를 끌고 온 두 제자는 겉옷을 벗어서 나귀의 등에 얹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자 따르던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폅니다. 밭에서 벤 나무 가지, 종려 가지를 꺾어 손에 듭니다. 소리 높여 찬송을 부르며 환호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3
2,000년 전 예루살렘 성문 밖, 한 컷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어도 은혜가 됩니다.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신 예수님, 겉옷을 벗어서 나귀 등에 얹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하는 제자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손에 들고 소리 높여 찬송을 부르는 무리들,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나귀를 내어주는 나귀 주인, 이렇게 종려주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아도 분명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시도를 해보려고 합니다. 2,000년 예루살렘 성문 밖, 한 컷의 사진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소품에다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려주일 소품,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태운 나귀고요, 둘째는 제자들이 벗은 겉옷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사람들이 꺾어 손에 든 종려나무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소품이 2024년 종려주일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에게 어떤 말을 걸어오는지,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첫째 나귀입니다.(2절)
1
성서의 땅에서 나귀는 아주 소중한 가축입니다.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릴 때 나귀의 힘을 빌리고, 추수를 할 때에도 나귀의 도움을 받고, 커다란 맷돌을 돌려 밀과 보리를 빻을 때에도 나귀의 힘을 빌립니다. 힘든 농사일은 물론이지만 무거운 짐을 옮길 때에도 나귀의 등을 빌리고, 먼 길을 떠날 때에도 나귀와 동행을 합니다.
그 소중한 나귀를 낯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허락도 없이 고삐를 풀어 끌고 가려는 것입니다. “왜 남의 나귀를 허락도 없이 끌고 가는 거요?” 그런데 들려온 말이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주인은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나귀를 내어 주었습니다.
성경에는 나귀 주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의 성품이 어떠했는지도 소개하지 않습니다. 나귀 주인과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내용도 없습니다. 나귀를 보낸 후에 어떤 복을 받았는지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 나귀를 쓰시겠다니!” 얼마나 큰 복인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나귀 주인의 믿음이 나귀에 담겨 있고,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을 기뻐하는 주인의 헌신도 나귀에게 그려져 있습니다. 나귀주인의 아름다운 믿음과 즐거운 헌신이 나귀와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늘과 땅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되,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바로 “나”입니다. 흙으로 빚으시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빚으셨고, 코에 주님의 숨결을 불어 넣으시어 하나님의 모양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최고의 작품인 “내가” 죄로 인하여 더럽혀 지고, 허물로 인하여 일그러지자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 피 값을 치루고 나를 사셨습니다. 나를 사신 후 빈 집으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성령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전이 되게 하셨으니, 예수님의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그 분의 청지기입니다.
3
요즈음 우리는 수요기도회에서 전도서를 차례대로 읽으면서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전도서 6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대로 부족함이 없이 받았습니다.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누리지 못하니 불행한 일이요, 가슴을 칠 통탄할 일이랍니다.(전6:2) 그렇습니다. 건강한 몸, 손에 있는 재능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주어진 시간과 넉넉한 재물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건강한 몸이 의의 병기로 쓰임을 받을 때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 손에 있는 재능이 선한 일을 이루어 갈 때 아름다운 열매가 됩니다. 주어진 시간들 중에서 주님의 일을 위하여 사용된 시간을 주님은 기억해 주시고, 넉넉한 재물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흘러갈 때 다함이 없는 보물이 되는 것입니다.
4
주님께 기쁨으로 내어드린 나귀를 두고 아름다운 동화가 한 토막 펼쳐집니다. 지난번에 둘째 아들네 집에 가서 손자 손녀 양쪽 팔로 감싸고 동화책을 읽어주던 일이 참 행복했는데, 그 마음으로 동화책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동화의 제목은 “나귀 삼형제”입니다. 나귀 삼 형제가 순례 길을 다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첫째가 하는 말, “하나님, 저에게 부자 주인을 만나게 해 주셔서 하루 세끼 끼니를 거른 적이 없습니다. 호텔 같은 좋은 우리가 준비되어 있어서 편안한 잠을 잤습니다. 힘든 일도 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대접받다가 왔습니다. 분당에 사는 애완견들처럼 말입니다.”
둘째가 하는 말, “하나님, 저는 열심히 일을 하는 주인을 만났습니다. 주인을 도와서 봄에는 밭을 갈고, 여름에는 짐을 나르고, 가을에는 추수를 도우면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제가 주인을 도와 일하는 동안, 제 주인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일하는 보람, 재산 늘어나는 재미를 맛보다가 이제 왔습니다.”
막내가 하는 말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 저는 맘씨 좋은 주인을 만나서 나귀 대접 받았고요, 부지런한 주인을 만나서 일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 저를 낯선 사람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몰랐기에 섭섭하기도 했지만, 제 등에 예수님이 오르시는 것입니다. 저는요 종려가지를 든 사람들의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모셨습니다.” 몇째 나귀가 되고 싶으십니까?
둘째 겉옷입니다.(7절)
1
제자들이 벗어서 나귀 등에 얹었던 겉옷, 군중들이 벗어서 카펫처럼 길에 폈던 겉옷에 초점을 맞추어 봅니다. 성서의 땅에서 속옷은 평상복입니다. 집근처에서 일을 할 때, 동네 한 바퀴 돌 때 입는 옷이 속옷인데 세마포로 만들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겉옷은 양털이나 염소 털로 실을 낳습니다. 털실을 씨줄과 날줄이 되게 하여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의 옷감을 짠 후, 한 가운데 머리가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냅니다. 그 구멍에 머리를 넣으면 옷감의 절반은 앞으로 내려오고, 절반은 뒤로 내려오는데 무릎까지 내려온 겉옷의 허리 부분을 띠로 띠면 겉옷은 완성이 됩니다. 겉옷은 멀리 여행할 때 속옷 위에다 걸치게 되는데, 여행하는 동안 낮에 비를 가려주고, 밤에는 추위를 막아주는 이불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겉옷은 “입는다.”라는 표현과 함께 “덮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2
성경에는 겉옷과 관계된 에피소드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엘리사선지자가 제자 하나를 부릅니다. “너는 허리를 동이고 손에 이 기름병을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그곳에서 예후 장군을 만나고, 그 분을 골방으로 데려가라. 그 머리에 기름을 붓고 이렇게 선포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노라.” 그 때 예후는 야전군 사령관으로 이스라엘의 북쪽 변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보냄을 받은 선지자는 골방 은밀한 곳에서 예후 장군을 만났고, 숨겨온 기름병을 꺼내어 장군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엘리사가 입에 넣어준 대로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노라.” 선포하였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예후장군은 군사혁명을 일으킵니다. 군대를 이끌고 왕궁이 있는 사마리아로 올라갑니다. 그 날 예후가 말에 오르자 따르던 군사들은 겉옷을 벗습니다. 벗은 겉옷을 사마리아로 올라가는 예후의 발아래 폅니다. “예후, 당신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왕이시여 우리를 다스리소서. 우리가 즐겨 순종하며, 생명을 바쳐 충성하겠나이다.”(왕하9:13) 이렇게 겉옷을 벗어서 길에 편다는 것은 존경의 표현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넘어, 복종하여 따르겠다는 충성의 서약이기도 한 것입니다.
3
제자들이 겉옷을 벗어서 나귀의 등에 얹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 앞에 폅니다. “내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 앞에 펴오니, 왕이신 예수님이여, 우리 가운데 좌정하소서. 왕이신 예수님, 우리를 다스려주소서.” 라는 결단의 표현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우리들을 양떼 같이 구원하시는 왕이시기에, 우리들을 왕관의 보석처럼 여호와의 땅에서 빛나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최고의 존경과 충성의 서약으로 겉옷을 길에 펴고 찬송은 부릅니다. 그 분 앞에 우리의 겉옷을 벗어 펴는 것, 우리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겉옷을 벗어서 왕이신 예수님 앞에 펴드리는 안디옥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종려나무입니다.
1
종려나무는 아열대식물이어서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성서의 땅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주 친근합니다. 작은 나무는 3미터지만 큰 나무는 10미터 넘게 자랍니다. 기둥은 조금의 굽어짐도 없이 하늘을 향하여 올곧습니다. 줄기와 잎은 그늘이 되어주기에 초막집을 짓는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열매는 아주 많이 달리는데, 한그루에서 80킬로그램의 열매를 거둡니다. 그 열매의 맛은 꿀처럼 달콤하고 그 모양은 대추를 닮아서 “대추야자”라고 부릅니다.
2
시편 92편에 보면,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 가운데서도 올곧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함에 흔들림이 없는 성도들을 종려나무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종려나무, 하나님의 집에 심겨졌기에 빛은 청청하고, 진액은 풍족하고, 열매는 그치지 않는 종려나무에 비유합니다.(시편92:12-13)
출애굽기에 보면 홍해바다를 건넌 이스라엘이 수르광야로 들어갑니다. 사흘 만에 마라의 쓴물을 만났지만 모세의 기도하는 무릎으로 쓴물은 단물이 되었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만난 이스라엘이 도착한 곳은 “엘림”이란 오아시스입니다. 엘림에는 종려나무 70주의 그늘이 있었고, 물 샘 열둘이 솟아올랐습니다. 이스라엘은 그곳에 장막을 치고 쉼을 얻습니다. 이렇게 종려나무는 복됩니다.
3
종려나무의 기둥이 올곧은 것, 종려나무 그늘이 쉼이 되는 것, 종려나무의 열매가 꿀처럼 달콤한 것도 복되지만, 더 복된 것은 종려나무에는 부활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종려나무”의 학명은 "phoenix"(불사조)입니다. 이집트 신화에 보면, 아라비아 사막에 사는 새가 있는데 수명이 500-600년입니다. 그 후에 스스로의 몸을 불태워서 죽이고,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전설을 가진 새가 불사조입니다. 왜 종려나무란 학명에 “불사조”란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일까? 종려나무를 베면 그루터기에 새순이 돋아납니다. 남은 그루터기를 불에 태우면 뿌리에서 다시 움이 돋아납니다. 죽지만 다시 살아나는 나무가 종려나무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어 다시 살아나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들도 부활하신 주님처럼 다시 사는 날에 있기에 종려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4
종려주일 소품 세 가지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예수님을 태운 나귀가, 제자들이 벗은 겉옷이, 사람들이 꺾어 손에 든 종려나무 가지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이제는 내가 나귀를 내어드리는 나귀 주인이 되고, 이제는 내가 겉옷을 벗어 십자가의 길에 펴드리고, 이제는 내가 종려가지를 꺾어들고 부활을 노래하겠습니다. 종려주일의 복된 결단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21: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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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에 맞추어 설교를 준비하다보면 가장 어려운 설교가 “종려주일” 설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 속에 성탄절, 여러 무대 위에 다양한 분들이 등장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오고, 요셉의 꿈속에서 아기 예수님의 이름이 지어집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를 드리고, 성탄의 기쁜 소식이 목자들에게 전해지면서 천군천사들의 찬송이 베들레헴 들녘에 울려 퍼집니다. 그 중에 하나를 본문으로 택하여 성탄절 설교를 준비하면 됩니다.
부활절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 속에는 부활절 이야기가 여러 토막 담겨 있습니다. 부활절 새벽 열린 무덤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절 오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부활절 밤 두려움으로 채워진 다락방에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시고, 여드레 후 도마는 주님의 못 자국 난 손을 보면서 아름다운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은 지친 제자들을 위하여 갈릴리 호숫가에다 숯불을 피워 조반을 준비하십니다. 그 중에 한 장면을 본문을 택하여 부활절 설교를 준비하면 됩니다.
종려주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종려주일 이야기가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지만 내용은 하나같습니다. 종려주일이 펼쳐지는 무대도, 등장하는 인물도, 장식도어 있는 소품도, 이야기의 줄거리도 하나같습니다. 그러니 종려주일이 돌아올 때마다 본문의 내용이 같을 수밖에 없는데요, 그 날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저와 함께 달려가 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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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무신 주님께서 “벳바게”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맞은 편 마을로 가보라.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가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 끌고 오너라. 혹시 주인이 나와서 ‘왜 남의 나귀를 끌어가는 거요?’라고 말하거든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그러면 즐거운 마음으로 내어줄 것이다.”
나귀를 끌고 온 두 제자는 겉옷을 벗어서 나귀의 등에 얹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자 따르던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폅니다. 밭에서 벤 나무 가지, 종려 가지를 꺾어 손에 듭니다. 소리 높여 찬송을 부르며 환호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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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예루살렘 성문 밖, 한 컷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어도 은혜가 됩니다.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신 예수님, 겉옷을 벗어서 나귀 등에 얹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하는 제자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손에 들고 소리 높여 찬송을 부르는 무리들,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나귀를 내어주는 나귀 주인, 이렇게 종려주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아도 분명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시도를 해보려고 합니다. 2,000년 예루살렘 성문 밖, 한 컷의 사진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소품에다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려주일 소품,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태운 나귀고요, 둘째는 제자들이 벗은 겉옷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사람들이 꺾어 손에 든 종려나무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소품이 2024년 종려주일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에게 어떤 말을 걸어오는지,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첫째 나귀입니다.(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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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땅에서 나귀는 아주 소중한 가축입니다.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릴 때 나귀의 힘을 빌리고, 추수를 할 때에도 나귀의 도움을 받고, 커다란 맷돌을 돌려 밀과 보리를 빻을 때에도 나귀의 힘을 빌립니다. 힘든 농사일은 물론이지만 무거운 짐을 옮길 때에도 나귀의 등을 빌리고, 먼 길을 떠날 때에도 나귀와 동행을 합니다.
그 소중한 나귀를 낯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허락도 없이 고삐를 풀어 끌고 가려는 것입니다. “왜 남의 나귀를 허락도 없이 끌고 가는 거요?” 그런데 들려온 말이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주인은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나귀를 내어 주었습니다.
성경에는 나귀 주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의 성품이 어떠했는지도 소개하지 않습니다. 나귀 주인과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내용도 없습니다. 나귀를 보낸 후에 어떤 복을 받았는지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 나귀를 쓰시겠다니!” 얼마나 큰 복인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나귀 주인의 믿음이 나귀에 담겨 있고,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을 기뻐하는 주인의 헌신도 나귀에게 그려져 있습니다. 나귀주인의 아름다운 믿음과 즐거운 헌신이 나귀와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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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늘과 땅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되,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바로 “나”입니다. 흙으로 빚으시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빚으셨고, 코에 주님의 숨결을 불어 넣으시어 하나님의 모양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최고의 작품인 “내가” 죄로 인하여 더럽혀 지고, 허물로 인하여 일그러지자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 피 값을 치루고 나를 사셨습니다. 나를 사신 후 빈 집으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성령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전이 되게 하셨으니, 예수님의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그 분의 청지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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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우리는 수요기도회에서 전도서를 차례대로 읽으면서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전도서 6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대로 부족함이 없이 받았습니다.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누리지 못하니 불행한 일이요, 가슴을 칠 통탄할 일이랍니다.(전6:2) 그렇습니다. 건강한 몸, 손에 있는 재능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주어진 시간과 넉넉한 재물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건강한 몸이 의의 병기로 쓰임을 받을 때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 손에 있는 재능이 선한 일을 이루어 갈 때 아름다운 열매가 됩니다. 주어진 시간들 중에서 주님의 일을 위하여 사용된 시간을 주님은 기억해 주시고, 넉넉한 재물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흘러갈 때 다함이 없는 보물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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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기쁨으로 내어드린 나귀를 두고 아름다운 동화가 한 토막 펼쳐집니다. 지난번에 둘째 아들네 집에 가서 손자 손녀 양쪽 팔로 감싸고 동화책을 읽어주던 일이 참 행복했는데, 그 마음으로 동화책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동화의 제목은 “나귀 삼형제”입니다. 나귀 삼 형제가 순례 길을 다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첫째가 하는 말, “하나님, 저에게 부자 주인을 만나게 해 주셔서 하루 세끼 끼니를 거른 적이 없습니다. 호텔 같은 좋은 우리가 준비되어 있어서 편안한 잠을 잤습니다. 힘든 일도 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대접받다가 왔습니다. 분당에 사는 애완견들처럼 말입니다.”
둘째가 하는 말, “하나님, 저는 열심히 일을 하는 주인을 만났습니다. 주인을 도와서 봄에는 밭을 갈고, 여름에는 짐을 나르고, 가을에는 추수를 도우면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제가 주인을 도와 일하는 동안, 제 주인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일하는 보람, 재산 늘어나는 재미를 맛보다가 이제 왔습니다.”
막내가 하는 말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 저는 맘씨 좋은 주인을 만나서 나귀 대접 받았고요, 부지런한 주인을 만나서 일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 저를 낯선 사람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몰랐기에 섭섭하기도 했지만, 제 등에 예수님이 오르시는 것입니다. 저는요 종려가지를 든 사람들의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모셨습니다.” 몇째 나귀가 되고 싶으십니까?
둘째 겉옷입니다.(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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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벗어서 나귀 등에 얹었던 겉옷, 군중들이 벗어서 카펫처럼 길에 폈던 겉옷에 초점을 맞추어 봅니다. 성서의 땅에서 속옷은 평상복입니다. 집근처에서 일을 할 때, 동네 한 바퀴 돌 때 입는 옷이 속옷인데 세마포로 만들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겉옷은 양털이나 염소 털로 실을 낳습니다. 털실을 씨줄과 날줄이 되게 하여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의 옷감을 짠 후, 한 가운데 머리가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냅니다. 그 구멍에 머리를 넣으면 옷감의 절반은 앞으로 내려오고, 절반은 뒤로 내려오는데 무릎까지 내려온 겉옷의 허리 부분을 띠로 띠면 겉옷은 완성이 됩니다. 겉옷은 멀리 여행할 때 속옷 위에다 걸치게 되는데, 여행하는 동안 낮에 비를 가려주고, 밤에는 추위를 막아주는 이불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겉옷은 “입는다.”라는 표현과 함께 “덮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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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겉옷과 관계된 에피소드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엘리사선지자가 제자 하나를 부릅니다. “너는 허리를 동이고 손에 이 기름병을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그곳에서 예후 장군을 만나고, 그 분을 골방으로 데려가라. 그 머리에 기름을 붓고 이렇게 선포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노라.” 그 때 예후는 야전군 사령관으로 이스라엘의 북쪽 변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보냄을 받은 선지자는 골방 은밀한 곳에서 예후 장군을 만났고, 숨겨온 기름병을 꺼내어 장군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엘리사가 입에 넣어준 대로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노라.” 선포하였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예후장군은 군사혁명을 일으킵니다. 군대를 이끌고 왕궁이 있는 사마리아로 올라갑니다. 그 날 예후가 말에 오르자 따르던 군사들은 겉옷을 벗습니다. 벗은 겉옷을 사마리아로 올라가는 예후의 발아래 폅니다. “예후, 당신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왕이시여 우리를 다스리소서. 우리가 즐겨 순종하며, 생명을 바쳐 충성하겠나이다.”(왕하9:13) 이렇게 겉옷을 벗어서 길에 편다는 것은 존경의 표현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넘어, 복종하여 따르겠다는 충성의 서약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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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겉옷을 벗어서 나귀의 등에 얹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 앞에 폅니다. “내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 앞에 펴오니, 왕이신 예수님이여, 우리 가운데 좌정하소서. 왕이신 예수님, 우리를 다스려주소서.” 라는 결단의 표현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우리들을 양떼 같이 구원하시는 왕이시기에, 우리들을 왕관의 보석처럼 여호와의 땅에서 빛나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최고의 존경과 충성의 서약으로 겉옷을 길에 펴고 찬송은 부릅니다. 그 분 앞에 우리의 겉옷을 벗어 펴는 것, 우리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겉옷을 벗어서 왕이신 예수님 앞에 펴드리는 안디옥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종려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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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나무는 아열대식물이어서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성서의 땅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주 친근합니다. 작은 나무는 3미터지만 큰 나무는 10미터 넘게 자랍니다. 기둥은 조금의 굽어짐도 없이 하늘을 향하여 올곧습니다. 줄기와 잎은 그늘이 되어주기에 초막집을 짓는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열매는 아주 많이 달리는데, 한그루에서 80킬로그램의 열매를 거둡니다. 그 열매의 맛은 꿀처럼 달콤하고 그 모양은 대추를 닮아서 “대추야자”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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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2편에 보면,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 가운데서도 올곧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함에 흔들림이 없는 성도들을 종려나무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종려나무, 하나님의 집에 심겨졌기에 빛은 청청하고, 진액은 풍족하고, 열매는 그치지 않는 종려나무에 비유합니다.(시편92:12-13)
출애굽기에 보면 홍해바다를 건넌 이스라엘이 수르광야로 들어갑니다. 사흘 만에 마라의 쓴물을 만났지만 모세의 기도하는 무릎으로 쓴물은 단물이 되었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만난 이스라엘이 도착한 곳은 “엘림”이란 오아시스입니다. 엘림에는 종려나무 70주의 그늘이 있었고, 물 샘 열둘이 솟아올랐습니다. 이스라엘은 그곳에 장막을 치고 쉼을 얻습니다. 이렇게 종려나무는 복됩니다.
3
종려나무의 기둥이 올곧은 것, 종려나무 그늘이 쉼이 되는 것, 종려나무의 열매가 꿀처럼 달콤한 것도 복되지만, 더 복된 것은 종려나무에는 부활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종려나무”의 학명은 "phoenix"(불사조)입니다. 이집트 신화에 보면, 아라비아 사막에 사는 새가 있는데 수명이 500-600년입니다. 그 후에 스스로의 몸을 불태워서 죽이고,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전설을 가진 새가 불사조입니다. 왜 종려나무란 학명에 “불사조”란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일까? 종려나무를 베면 그루터기에 새순이 돋아납니다. 남은 그루터기를 불에 태우면 뿌리에서 다시 움이 돋아납니다. 죽지만 다시 살아나는 나무가 종려나무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어 다시 살아나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들도 부활하신 주님처럼 다시 사는 날에 있기에 종려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4
종려주일 소품 세 가지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예수님을 태운 나귀가, 제자들이 벗은 겉옷이, 사람들이 꺾어 손에 든 종려나무 가지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이제는 내가 나귀를 내어드리는 나귀 주인이 되고, 이제는 내가 겉옷을 벗어 십자가의 길에 펴드리고, 이제는 내가 종려가지를 꺾어들고 부활을 노래하겠습니다. 종려주일의 복된 결단이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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