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2. 18(주일낮)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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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4-02-16 11:36
조회
843
제목: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1)
성경: 마태복음 16: 21- 24
1
성서의 땅, 이스라엘의 지도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예루살렘”을 찾아보시지요? 성서의 땅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단”을 찾아보지요? 대한민국의 영토를 말할 때 “백두에서 한라까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몫 지어 주신 땅을 말할 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하는데, 오늘 펼쳐놓은 지도에는 “단”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브엘세바”도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신 “헬몬산”을 찾아보시지요? 한반도의 지붕이 백두산인 것처럼, 이스라엘의 지붕은 헬몬산인데, 해발 2800미터 헬몬산 남쪽 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 있습니다. 지도에서 찾아보시면,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이곳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의 출발점입니다.
2
주님은 이곳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님은 최고의 칭찬, 최상의 축복을 선포하십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 네가 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게 된 것은 남다른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빼어난 판단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풍성한 경험이 있기 때문도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 베드로를 향한 최고의 칭찬, 최상의 축복은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너는 베드로, 반석이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기 못하리라.” 베드로를 향한 최고의 칭찬, 최상의 축복은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3
베드로가 최고의 칭찬을 들었던 곳에서 장소를 옮긴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자리입니다. 최상의 축복을 받았던 그 시간에서 하룻밤을 지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시간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호되게 책망을 하십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고 최고의 칭찬을 하셨는데,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최상의 약속을 하셨는데,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고 최고의 선물을 주셨는데, 곧바로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호되게 책망을 하십니다.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였기에, 베드로가 어떤 행동을 하였기에 이토록 호되게 꾸짖으셨을까?
제자들이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자 주님은 속마음을 털어놓으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마태16:21)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제자인 베드로가 스승인 예수님을 비난하고 나선 것입니다. “예수님, 정신 차리세요.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위에 오르십니다. 유다를 압박하던 로마군대를 몰아내시고, 잘못된 제도는 뜯어 고치시고, 세계를 호령하며 다스리시는 왕이 되셔야 하실 분이 장로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는다니요, 대제사장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니요. 예수님, 지금 제 정신이세요.”
비난할 뿐만 아니라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주님! 제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서던 날 소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인내한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이 왕위에 오르시면 나 베드로도 한 자리 차지한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장로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는다니요, 대제사장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니요. 제발 그렇게 하지는 마십시오.”
비난하고 간청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고 나섭니다. “이 일이 결코 주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장로들에게 고난을 받는다니요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 죽임을 당하다니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 베드로가 온몸으로 막아내겠습니다. 그러니 많은 고난을 받는다느니, 죽임을 당한다느니, 그런 말씀일랑 입 밖에도 내지 마세요.”
4
이런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꾸짖으시면서 어떤 사람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는지, 어떤 사람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없는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는 사람이라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자기 십자가를 거절한다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23절)
1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시는데, 제가 그 길에 있었다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질문이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일이고, 어디까지가 사람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로 구분을 하시는데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항상 대립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들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인데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의 질문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오늘 분문 속에서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분명하고도 명쾌하게 구분이 됩니다. 먼저 베드로가 생각하였던 “사람의 일”을 만나보십시다. “예수님이 하늘 기적을 베풀면서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오르신다. 로마를 몰아내고 세계를 한 손에 거머쥐는 만왕의 왕이 되신다. 잘못된 제도는 뜯어 고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존중받는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 전쟁이 평화가 넘치는, 부족함과 모자람이 없는 풍요로운 세상을 만드신다.” 그런 메시아를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따랐는데,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신다니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결코 그런 일이 주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3
이번에는 예수님이 생각하셨던 “하나님의 일”을 살펴봅시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아무리 좋은 정치제도도 소망이 없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뿌리내리고 있는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물질적인 풍요도 의미가 없습니다.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리 좋은 교육, 아무리 발달된 과학 문명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분이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 분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 분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 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말씀대로 주님은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를 세우시고, 온 인류의 죄를 씻는 대속의 보혈을 흘리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펼치십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펼치십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면서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웠던 현장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산상수훈의 펼쳐지던 팔복산입니다. 주님은 둘러앉는 무리들을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생명을 지니고 있는 동안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람이 몸을 지니고 있는 동안 무엇을 마실까? 근심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사람이 이 땅위에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입을까? 애를 쓰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공중의 새를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먹을 것도 예비하십니다. 들의 백합화를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입을 옷도 준비하십니다. 그러니 무엇을 먹고 마실까보다 먼저 구해야 할 것, 무엇을 입을까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보다 내가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무엇을 입을까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5
이번에는 겟세마네로 자리를 옮겨보십시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감람산을 오르셨고, 겟세마네에서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고난의 잔을 거절하는 것, 사람의 일입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천군과 천사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군병을 쓰러뜨리려는 것,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앞세우면서 고난의 잔을 마시기로 결심하십니다. 고난의 잔을 받아 드시자 하늘로부터 천사들이 나타나서 힘을 보탭니다.
6
이번에는 여러분을 전도서로 안내합니다. 요즈음 수요기도회에서 전도서를 차례대로 읽으면서 은혜를 나누고 있는데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의 일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너나없이 크게 되기를, 더 크게 되기를 원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많이 얻기를, 더 많이 얻기를 원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먼저 가기를, 더 먼저 가기를 원합니다. 더 크게 되고, 더 많이 얻고, 더 빨리 가려는 것들이 사람의 일입니다.(전1:16)
이런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는 성도는 선을 행하는데, 기뻐하면서 선을 행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 여기라고 하는 장소, 지금 여기에서 마주하는 사람과 일들 속에서 선한 것, 옳은 것을 찾습니다.(전3:12) 기뻐하며 선을 행하였던 하나님의 일은 영원한 보물이 됩니다.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었으니,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는 안디옥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24절)
1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베드로를 책망하신 후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 날 주님은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워야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는 것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같은 뜻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고난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 날 주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들었던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뵌 후, 오순절 성령을 받은 후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기까지 주님을 따릅니다.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랐던 베드로사도는 우리들에게 이런 당부를 하셨습니다.
내가 잘못을 해서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한다면 무슨 칭찬이 있겠습니까? 그런 고난을 당하면서 십자가를 진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고난당할 만한 허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에 맞을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가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면서 어려움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지켜내면서 박해를 받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환난을 당합니다. 이렇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을 때 참으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벧전2:19-20)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바울은 고난을 받고 있음에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을 당하고 있음에도 즐거워합니다. 왜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기 때문이랍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의 고난이 더해져야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우리의 고난과 희생이 채워져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고난은 온 인류를 흑암에서 건져내기에 충분하고 넉넉합니다. 주님이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은 믿는 모든 사람들을 주님의 나라로 옮기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이 화목제물로 조금의 모자람도 없이 완벽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표현을 쓰고 있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채우노라”라는 동사가 헬라어에서는 모자라는 부분을 가득히 채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맞은편, 상대편에 상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복음이 되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니, 복음을 받은 나도 고난을 기뻐하면서 복음의 일꾼이 되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으로 교회의 머리가 되심과 같이,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꾼도 주님처럼 고난을 각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의 몸에 고난 받는 흔적이 생길 때마다 “내가 복음의 일꾼이 되었구나.” 기뻐하며 감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주시는 기도제목이 둘입니다. “주님,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게 하옵소서. 주님,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되 끝까지 따르게 하옵소서.”
성경: 마태복음 16: 2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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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땅, 이스라엘의 지도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예루살렘”을 찾아보시지요? 성서의 땅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단”을 찾아보지요? 대한민국의 영토를 말할 때 “백두에서 한라까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몫 지어 주신 땅을 말할 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하는데, 오늘 펼쳐놓은 지도에는 “단”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브엘세바”도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신 “헬몬산”을 찾아보시지요? 한반도의 지붕이 백두산인 것처럼, 이스라엘의 지붕은 헬몬산인데, 해발 2800미터 헬몬산 남쪽 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 있습니다. 지도에서 찾아보시면,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이곳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의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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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이곳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님은 최고의 칭찬, 최상의 축복을 선포하십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 네가 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게 된 것은 남다른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빼어난 판단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풍성한 경험이 있기 때문도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 베드로를 향한 최고의 칭찬, 최상의 축복은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너는 베드로, 반석이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기 못하리라.” 베드로를 향한 최고의 칭찬, 최상의 축복은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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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최고의 칭찬을 들었던 곳에서 장소를 옮긴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자리입니다. 최상의 축복을 받았던 그 시간에서 하룻밤을 지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시간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호되게 책망을 하십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고 최고의 칭찬을 하셨는데,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최상의 약속을 하셨는데,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고 최고의 선물을 주셨는데, 곧바로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호되게 책망을 하십니다.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였기에, 베드로가 어떤 행동을 하였기에 이토록 호되게 꾸짖으셨을까?
제자들이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자 주님은 속마음을 털어놓으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마태16:21)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제자인 베드로가 스승인 예수님을 비난하고 나선 것입니다. “예수님, 정신 차리세요.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위에 오르십니다. 유다를 압박하던 로마군대를 몰아내시고, 잘못된 제도는 뜯어 고치시고, 세계를 호령하며 다스리시는 왕이 되셔야 하실 분이 장로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는다니요, 대제사장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니요. 예수님, 지금 제 정신이세요.”
비난할 뿐만 아니라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주님! 제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서던 날 소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인내한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이 왕위에 오르시면 나 베드로도 한 자리 차지한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장로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는다니요, 대제사장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니요. 제발 그렇게 하지는 마십시오.”
비난하고 간청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고 나섭니다. “이 일이 결코 주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장로들에게 고난을 받는다니요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 죽임을 당하다니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 베드로가 온몸으로 막아내겠습니다. 그러니 많은 고난을 받는다느니, 죽임을 당한다느니, 그런 말씀일랑 입 밖에도 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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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꾸짖으시면서 어떤 사람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는지, 어떤 사람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없는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는 사람이라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자기 십자가를 거절한다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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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시는데, 제가 그 길에 있었다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질문이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일이고, 어디까지가 사람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로 구분을 하시는데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항상 대립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들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인데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의 질문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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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분문 속에서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분명하고도 명쾌하게 구분이 됩니다. 먼저 베드로가 생각하였던 “사람의 일”을 만나보십시다. “예수님이 하늘 기적을 베풀면서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오르신다. 로마를 몰아내고 세계를 한 손에 거머쥐는 만왕의 왕이 되신다. 잘못된 제도는 뜯어 고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존중받는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 전쟁이 평화가 넘치는, 부족함과 모자람이 없는 풍요로운 세상을 만드신다.” 그런 메시아를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따랐는데,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신다니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결코 그런 일이 주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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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예수님이 생각하셨던 “하나님의 일”을 살펴봅시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아무리 좋은 정치제도도 소망이 없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뿌리내리고 있는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물질적인 풍요도 의미가 없습니다.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리 좋은 교육, 아무리 발달된 과학 문명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분이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 분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 분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 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말씀대로 주님은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를 세우시고, 온 인류의 죄를 씻는 대속의 보혈을 흘리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펼치십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펼치십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면서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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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웠던 현장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산상수훈의 펼쳐지던 팔복산입니다. 주님은 둘러앉는 무리들을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생명을 지니고 있는 동안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람이 몸을 지니고 있는 동안 무엇을 마실까? 근심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사람이 이 땅위에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입을까? 애를 쓰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공중의 새를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먹을 것도 예비하십니다. 들의 백합화를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입을 옷도 준비하십니다. 그러니 무엇을 먹고 마실까보다 먼저 구해야 할 것, 무엇을 입을까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보다 내가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무엇을 입을까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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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겟세마네로 자리를 옮겨보십시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감람산을 오르셨고, 겟세마네에서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고난의 잔을 거절하는 것, 사람의 일입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천군과 천사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군병을 쓰러뜨리려는 것,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앞세우면서 고난의 잔을 마시기로 결심하십니다. 고난의 잔을 받아 드시자 하늘로부터 천사들이 나타나서 힘을 보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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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여러분을 전도서로 안내합니다. 요즈음 수요기도회에서 전도서를 차례대로 읽으면서 은혜를 나누고 있는데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의 일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너나없이 크게 되기를, 더 크게 되기를 원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많이 얻기를, 더 많이 얻기를 원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먼저 가기를, 더 먼저 가기를 원합니다. 더 크게 되고, 더 많이 얻고, 더 빨리 가려는 것들이 사람의 일입니다.(전1:16)
이런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는 성도는 선을 행하는데, 기뻐하면서 선을 행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 여기라고 하는 장소, 지금 여기에서 마주하는 사람과 일들 속에서 선한 것, 옳은 것을 찾습니다.(전3:12) 기뻐하며 선을 행하였던 하나님의 일은 영원한 보물이 됩니다.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었으니,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는 안디옥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24절)
1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베드로를 책망하신 후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 날 주님은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워야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는 것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같은 뜻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고난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 날 주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들었던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뵌 후, 오순절 성령을 받은 후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기까지 주님을 따릅니다.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랐던 베드로사도는 우리들에게 이런 당부를 하셨습니다.
내가 잘못을 해서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한다면 무슨 칭찬이 있겠습니까? 그런 고난을 당하면서 십자가를 진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고난당할 만한 허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에 맞을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가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면서 어려움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지켜내면서 박해를 받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환난을 당합니다. 이렇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을 때 참으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벧전2:19-20)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바울은 고난을 받고 있음에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을 당하고 있음에도 즐거워합니다. 왜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기 때문이랍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의 고난이 더해져야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우리의 고난과 희생이 채워져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고난은 온 인류를 흑암에서 건져내기에 충분하고 넉넉합니다. 주님이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은 믿는 모든 사람들을 주님의 나라로 옮기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이 화목제물로 조금의 모자람도 없이 완벽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표현을 쓰고 있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채우노라”라는 동사가 헬라어에서는 모자라는 부분을 가득히 채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맞은편, 상대편에 상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복음이 되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니, 복음을 받은 나도 고난을 기뻐하면서 복음의 일꾼이 되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으로 교회의 머리가 되심과 같이,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꾼도 주님처럼 고난을 각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의 몸에 고난 받는 흔적이 생길 때마다 “내가 복음의 일꾼이 되었구나.” 기뻐하며 감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주시는 기도제목이 둘입니다. “주님,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게 하옵소서. 주님,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되 끝까지 따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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