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1. 14.(주일낮) 온유한 마음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1-12 12:06
조회
964
제목: 온유한 마음
성경: 마태복음 5 : 5 - 6
1
“온유”란 한자로 “따뜻할 온(溫)” 자와 “부드러울 유(柔)” 자이니, 더 없이 좋은 뜻을 지닌 단어인데, 부정적으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줏대 없는 사람, 순하기만 해서 제 밥그릇도 못 챙기는 사람, 마음씨는 참 좋은데 생활력이 젬병인 사람을, 듣기 좋은 말로 “온유하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이란 “세파를 헤치면서도 마음이 차갑지 않고 따뜻한 사람, 계산이 앞서는 험한 인간관계에서도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사람”의 마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한자어가 담아내는 온유의 뜻이 참 복되지만, 헬라어가 담아내는 온유의 뜻은 더 복됩니다. 헬라어에서 “온유”란 밖으로부터 다가오는 고난에 대하여 거칠게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반응하는, 상대방으로부터 모함과 억압을 받을 때에도 앙갚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따뜻하게 대하는 것을 “온유”라고 합니다.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하는 이유가 내게 힘이 없어서, 앙갚음할 능력이 없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알고 계시는 하나님, 가장 좋은 때 가장 은혜로운 방법으로 갚아주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복된 마음이고, 얼마나 아름다운 성품입니까? 이렇게 복된 마음이 오늘 말씀 앞에 마음을 열고 있는 안디옥식구들의 마음이시기를 축복합니다.
2
좀 더 쉽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온유”란 나약하고 연약한 마음이 결코 아닙니다. 줏대 없이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는 성품도 아닙니다. 야생마를 잘 훈련시켜서 주인의 통제 아래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가 온유입니다. 야생마가 길들여지기 전에는 천방지축, 제멋대로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손에 잘 길들여지면 주인의 신호를 따라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합니다.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온유함으로 단장된 그리스도인은 자기주장보다 나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의 뜻을 앞세우고요, 육체의 욕망보다 보혜사 성령님의 이끄심을 앞세우고요, 더 크게 되고 더 많이 갖는 것보다 주님께서 존귀하게 되는 것을 더 가치있게 여깁니다. 그러기에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만나는 사건을 은혜로 받아들이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마주하는 사물들까지 세심히 살피는 성품이 온유이니, 얼마나 복된 마음이고, 얼마나 아름다운 성품입니까?
3
“온유함”으로 단장되었던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보십시다. 먼저 요셉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옷”을 연결고리로 펼쳐집니다. 소년 요셉은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이 담겨 있는 채색 옷을 입고 등장을 하지만 형들의 미움으로 채색 옷은 찢겨지고 노예로 팔려갑니다. 시위대장 보디발은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고 가정 총무의 옷을 입혀주지만 성결을 지켜내다가 겉옷은 벗겨지고, 벗겨진 겉옷은 거짓 증거품이 되어 감옥에 갇힙니다.
억울하게 죄수의 옷을 입었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보여 지면서 감옥의 제반 사무를 도맡아 처리하게 됩니다. 어느 날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감옥을 벗어나는 줄 알았는데 잊혀 진 이름이 됩니다. 채색 옷은 형들의 미움으로 찢겨지고, 가정 총무 옷은 성결을 지켜내다가 벗겨지고, 죄수의 옷을 입고 은혜를 베풀지만 잊혀 진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가장 복된 시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가장 선한 방법으로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면서 국무총리가 되어 세마포 옷을 입고 인장 반지를 끼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버금수레에 올라 칠년 흉년의 때 만국의 생명을 구원하게 됩니다.
요셉이 총리의 옷을 입고 한 일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칠년 흉년의 때에 만국의 생명을 구원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형들을 용서하면서 화해하는 일입니다. 두 가지 일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합니까? 형님들과 화해한 것보다 만국을 구한 일이 더 귀할 텐데, 성경은 요셉이 만국을 흉년과 기근에서 구한 일은 짧게 언급하고, 형님과 화해하는 이야기는 긴 드라마로 중요하고도 재미있게, 의미 있고도 아름답게 펼쳐냅니다.
화해의 절정은 요셉이 커밍아웃하는 순간입니다. “형님들, 저는 형님들이 애굽에 판 아우 요셉입니다. 저를 이곳에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십시오. 한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곳으로 보내셨나이다.”(창45:4-5) 이것이 요셉의 온유입니다. 억울한 일에 대하여 앙갚음 할 수 있는 힘이 요셉에게는 있습니다. 찢겨진 채색 옷에 대하여 형님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벗겨진 총무 옷에 대하여 보디발의 데려다가 시시비비를 가리고, 은혜를 잊은 술 맡은 관원장을 찾아서 따져도 됩니다. 그러나 온유함으로 단장된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찢겨진 옷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벗겨진 옷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잊힌 옷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 요셉의 모습입니다.
4
“온유함”에 있어서 요셉에게 뒤쳐지지 않는 분이 모세입니다. 제가 그렇게 정리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이 땅 위에 살았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온유한 사람을 뽑으라면 망설일 것이 없이 “모세”를 뽑는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모세를 비방하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누님이면서 여선지자인 미리암과 형님이면서 대제사장인 아론입니다. 모세를 가장 많이 이해해 주고, 도움이 되어야 할 누님이고, 형님인데 비방하고 나선 것입니다. “모세, 당신이 어찌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단 말이오. 하나님께서 자네와만 말씀하시는 줄 아시오. 우리와도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누님과 형님의 비난을 어떻게 대하는가? 온유함으로 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복되게 처리하시리라.”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 그리고 미리암을 성막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십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내가 꿈으로 말하기도 하고, 환상으로 알리기도 하지만 내 종 모세와는 얼굴을 맞대고 말하느니라.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떠나셨는데 미리암의 온 몸에 나병이 하얗게 번져 나옵니다.
평범한 사람 같으면 형님이 비방하고 나섰을 때 너무나도 분해서 시시비비를 따졌을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 같으면 누님의 몸에서 나병이 퍼져나갈 때 마음속으로라도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유함을 단장된 모세는 누님의 허물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하여 죄를 범하였나이다. 누님을 고쳐주시옵소서.” 비방을 받을 때에도 따뜻한 마음으로 누님의 아픔을 짊어지는 모세를 두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민12:3)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정리하면 온유함이란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이었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데서 오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온유함으로 단장되었던 믿음의 사람 요셉을 만나보았고, 온유함으로 단장되었던 모세도 만나보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온유한 마음으로 단장할 수 있을까?
첫째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1
어떻게 하면 속마음은 따뜻하고,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에 대하여 마주하는 사건에 대하여 부드럽게 대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태11:28-29)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과 멍에를 매면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이 내게로 흘러 들어옵니다. 예수님에게 배우면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이 내게로 흘러들어옵니다.
2
신약성경 중에 히브리서가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편지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히브리인이 지키던 구약의 제사제도가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완벽하게 완성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성서 속에 그려져 있는 성막이 십자가와 부활로 복음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온전하게 완성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된 책인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권면으로 편지를 엽니다. 오늘 예배자로 선 우리들을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늘에 부르심을 받고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옮겨졌고, 땅에 속한 사람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거룩한 사람”이 되었으니 예수님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를 열면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라고 하더니, 히브리서를 닫으면서도 “예수를 바라보자.”고 합니다. 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예수님은 믿음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일그러진 마음도 온전하게 하시고, 차가운 마음도 온전하게 하시고, 가시덤불 덮힌 마음도 온전하게 하시되 온유한 마음을 부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온유한 예수님의 마음이 내게로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1
시편 119편, 자그마치 176절로 이루어져 있는 시편 119편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머물게 하는데, 마음에 머물게 하면 말씀은 나의 신앙인품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게 머물게 하는데, 입술에 머물게 하면 말씀은 나의 입술에서 향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머물게 하는데, 내 발걸음에 머물게 하면 등불이 되고, 빛이 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온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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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맛보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온유한 마음이 됩니다. 말씀의 맛을 느끼는데 어찌 그리 단지 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 말씀의 맛을 음미하는데, 천천의 은금보다 더 좋다고, 백만 냥의 금보다 백만 냥의 은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좋다고 고백합니다. 말씀의 맛을 느끼는데 전쟁에서 승리한 후, 탈취물을 나누는 것 보다 더한 기쁨이 말씀 속에 있다고 고백하니, 그런 사람의 마음이 온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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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칭찬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고,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기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분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균형이 잡힌 그리스도인의 모습,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으로 인하여 많은 환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말씀을 받는데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냥 기쁨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기쁨으로 말씀을 받으니, 성도들의 마음은 주님의 온유한 마음이 되고, 성도들의 삶 속에서는 온유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묻어나니,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에 본이 되었습니다.
셋째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1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정리합니다. 한자어로 온유란 세파를 헤치면서도 차갑지 않고 따뜻한 마음, 계산이 앞서는 험한 인간관계에서도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마음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헬라어로 온유가 더 복되었습니다. 밖으로부터 다가오는 고난에 대하여 거칠게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반응하는, 상대방으로부터 모함과 억압을 받을 때에도 앙갚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따뜻하게 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성서 속에서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등장하는 두 분을 만나는데, 요셉은 채색 옷을 찢고 애굽에로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향하여 앙갚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화목을 이룹니다. 모세는 자신을 비방하다 나병이 발한 누님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끌어안고 기도의 자리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렇게 복된 온유한 마음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우리는 두 가지 길을 찾았습니다. 하나는 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생각하면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이 우리들에게로 흘러들어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있게 하고, 입술에 있게 하고, 걷는 발걸음 위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2
온유한 사람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누가 물으면 여러분은 어떤 답을 내놓겠습니까? “온유한 마음으로 단장하면 넓은 땅을, 기름진 땅을 선물 받습니다.” 라고 해석하시겠습니까? “경치가 좋은 곳에 예쁜 정원까지 갖춘 집을 갖게 됩니다.”라고 해석을 하시겠습니까?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해 아래 살면서 더 크게 되고, 더 많이 갖게 된다는 뜻입니까?
저는 이 부분이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을 단 한 구절로 그려내는데,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2:52) 지혜와 키가 함께 자라는 것이 복된 것처럼, 하늘의 하나님에게도 사랑받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이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소년시절의 모티브는 사무엘에게 있습니다. 실로 성막 뜰에서 예배의 에봇을 입고 자라는 소년 사무엘의 모습을 이렇게 담아냅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삼상2:26) 이렇게 하나님께 은총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은총을 받는 사무엘의 모습이 이렇게도 그려집니다. “사무엘이 자라는데,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함께 하셔서, 사무엘이 한 말이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땅의 가장 북쪽 마을 단에서부터 가장 남쪽 마을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사무엘을 하나님의 선지지로 세우셨음을 인정하여, 그 땅에 모든 백성들이 존중하고, 사랑하고,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닐까요? 온유한 마음, 여러분의 마음이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은 온유한 사람의 복이 여러분의 복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5 : 5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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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란 한자로 “따뜻할 온(溫)” 자와 “부드러울 유(柔)” 자이니, 더 없이 좋은 뜻을 지닌 단어인데, 부정적으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줏대 없는 사람, 순하기만 해서 제 밥그릇도 못 챙기는 사람, 마음씨는 참 좋은데 생활력이 젬병인 사람을, 듣기 좋은 말로 “온유하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이란 “세파를 헤치면서도 마음이 차갑지 않고 따뜻한 사람, 계산이 앞서는 험한 인간관계에서도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사람”의 마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한자어가 담아내는 온유의 뜻이 참 복되지만, 헬라어가 담아내는 온유의 뜻은 더 복됩니다. 헬라어에서 “온유”란 밖으로부터 다가오는 고난에 대하여 거칠게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반응하는, 상대방으로부터 모함과 억압을 받을 때에도 앙갚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따뜻하게 대하는 것을 “온유”라고 합니다.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하는 이유가 내게 힘이 없어서, 앙갚음할 능력이 없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알고 계시는 하나님, 가장 좋은 때 가장 은혜로운 방법으로 갚아주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복된 마음이고, 얼마나 아름다운 성품입니까? 이렇게 복된 마음이 오늘 말씀 앞에 마음을 열고 있는 안디옥식구들의 마음이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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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쉽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온유”란 나약하고 연약한 마음이 결코 아닙니다. 줏대 없이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는 성품도 아닙니다. 야생마를 잘 훈련시켜서 주인의 통제 아래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가 온유입니다. 야생마가 길들여지기 전에는 천방지축, 제멋대로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손에 잘 길들여지면 주인의 신호를 따라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합니다.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온유함으로 단장된 그리스도인은 자기주장보다 나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의 뜻을 앞세우고요, 육체의 욕망보다 보혜사 성령님의 이끄심을 앞세우고요, 더 크게 되고 더 많이 갖는 것보다 주님께서 존귀하게 되는 것을 더 가치있게 여깁니다. 그러기에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만나는 사건을 은혜로 받아들이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마주하는 사물들까지 세심히 살피는 성품이 온유이니, 얼마나 복된 마음이고, 얼마나 아름다운 성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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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함”으로 단장되었던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보십시다. 먼저 요셉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옷”을 연결고리로 펼쳐집니다. 소년 요셉은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이 담겨 있는 채색 옷을 입고 등장을 하지만 형들의 미움으로 채색 옷은 찢겨지고 노예로 팔려갑니다. 시위대장 보디발은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고 가정 총무의 옷을 입혀주지만 성결을 지켜내다가 겉옷은 벗겨지고, 벗겨진 겉옷은 거짓 증거품이 되어 감옥에 갇힙니다.
억울하게 죄수의 옷을 입었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보여 지면서 감옥의 제반 사무를 도맡아 처리하게 됩니다. 어느 날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감옥을 벗어나는 줄 알았는데 잊혀 진 이름이 됩니다. 채색 옷은 형들의 미움으로 찢겨지고, 가정 총무 옷은 성결을 지켜내다가 벗겨지고, 죄수의 옷을 입고 은혜를 베풀지만 잊혀 진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가장 복된 시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가장 선한 방법으로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면서 국무총리가 되어 세마포 옷을 입고 인장 반지를 끼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버금수레에 올라 칠년 흉년의 때 만국의 생명을 구원하게 됩니다.
요셉이 총리의 옷을 입고 한 일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칠년 흉년의 때에 만국의 생명을 구원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형들을 용서하면서 화해하는 일입니다. 두 가지 일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합니까? 형님들과 화해한 것보다 만국을 구한 일이 더 귀할 텐데, 성경은 요셉이 만국을 흉년과 기근에서 구한 일은 짧게 언급하고, 형님과 화해하는 이야기는 긴 드라마로 중요하고도 재미있게, 의미 있고도 아름답게 펼쳐냅니다.
화해의 절정은 요셉이 커밍아웃하는 순간입니다. “형님들, 저는 형님들이 애굽에 판 아우 요셉입니다. 저를 이곳에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십시오. 한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곳으로 보내셨나이다.”(창45:4-5) 이것이 요셉의 온유입니다. 억울한 일에 대하여 앙갚음 할 수 있는 힘이 요셉에게는 있습니다. 찢겨진 채색 옷에 대하여 형님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벗겨진 총무 옷에 대하여 보디발의 데려다가 시시비비를 가리고, 은혜를 잊은 술 맡은 관원장을 찾아서 따져도 됩니다. 그러나 온유함으로 단장된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찢겨진 옷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벗겨진 옷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잊힌 옷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 요셉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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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함”에 있어서 요셉에게 뒤쳐지지 않는 분이 모세입니다. 제가 그렇게 정리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이 땅 위에 살았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온유한 사람을 뽑으라면 망설일 것이 없이 “모세”를 뽑는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모세를 비방하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누님이면서 여선지자인 미리암과 형님이면서 대제사장인 아론입니다. 모세를 가장 많이 이해해 주고, 도움이 되어야 할 누님이고, 형님인데 비방하고 나선 것입니다. “모세, 당신이 어찌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단 말이오. 하나님께서 자네와만 말씀하시는 줄 아시오. 우리와도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누님과 형님의 비난을 어떻게 대하는가? 온유함으로 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복되게 처리하시리라.”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 그리고 미리암을 성막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십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내가 꿈으로 말하기도 하고, 환상으로 알리기도 하지만 내 종 모세와는 얼굴을 맞대고 말하느니라.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떠나셨는데 미리암의 온 몸에 나병이 하얗게 번져 나옵니다.
평범한 사람 같으면 형님이 비방하고 나섰을 때 너무나도 분해서 시시비비를 따졌을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 같으면 누님의 몸에서 나병이 퍼져나갈 때 마음속으로라도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유함을 단장된 모세는 누님의 허물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하여 죄를 범하였나이다. 누님을 고쳐주시옵소서.” 비방을 받을 때에도 따뜻한 마음으로 누님의 아픔을 짊어지는 모세를 두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민12:3)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정리하면 온유함이란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이었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데서 오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온유함으로 단장되었던 믿음의 사람 요셉을 만나보았고, 온유함으로 단장되었던 모세도 만나보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온유한 마음으로 단장할 수 있을까?
첫째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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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속마음은 따뜻하고,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에 대하여 마주하는 사건에 대하여 부드럽게 대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태11:28-29)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과 멍에를 매면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이 내게로 흘러 들어옵니다. 예수님에게 배우면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이 내게로 흘러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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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중에 히브리서가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편지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히브리인이 지키던 구약의 제사제도가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완벽하게 완성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성서 속에 그려져 있는 성막이 십자가와 부활로 복음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온전하게 완성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된 책인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권면으로 편지를 엽니다. 오늘 예배자로 선 우리들을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늘에 부르심을 받고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옮겨졌고, 땅에 속한 사람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거룩한 사람”이 되었으니 예수님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를 열면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라고 하더니, 히브리서를 닫으면서도 “예수를 바라보자.”고 합니다. 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예수님은 믿음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일그러진 마음도 온전하게 하시고, 차가운 마음도 온전하게 하시고, 가시덤불 덮힌 마음도 온전하게 하시되 온유한 마음을 부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온유한 예수님의 마음이 내게로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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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9편, 자그마치 176절로 이루어져 있는 시편 119편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머물게 하는데, 마음에 머물게 하면 말씀은 나의 신앙인품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게 머물게 하는데, 입술에 머물게 하면 말씀은 나의 입술에서 향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머물게 하는데, 내 발걸음에 머물게 하면 등불이 되고, 빛이 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온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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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맛보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온유한 마음이 됩니다. 말씀의 맛을 느끼는데 어찌 그리 단지 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 말씀의 맛을 음미하는데, 천천의 은금보다 더 좋다고, 백만 냥의 금보다 백만 냥의 은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좋다고 고백합니다. 말씀의 맛을 느끼는데 전쟁에서 승리한 후, 탈취물을 나누는 것 보다 더한 기쁨이 말씀 속에 있다고 고백하니, 그런 사람의 마음이 온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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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칭찬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고,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기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분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균형이 잡힌 그리스도인의 모습,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으로 인하여 많은 환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말씀을 받는데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냥 기쁨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기쁨으로 말씀을 받으니, 성도들의 마음은 주님의 온유한 마음이 되고, 성도들의 삶 속에서는 온유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묻어나니,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에 본이 되었습니다.
셋째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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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정리합니다. 한자어로 온유란 세파를 헤치면서도 차갑지 않고 따뜻한 마음, 계산이 앞서는 험한 인간관계에서도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마음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헬라어로 온유가 더 복되었습니다. 밖으로부터 다가오는 고난에 대하여 거칠게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반응하는, 상대방으로부터 모함과 억압을 받을 때에도 앙갚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따뜻하게 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성서 속에서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등장하는 두 분을 만나는데, 요셉은 채색 옷을 찢고 애굽에로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향하여 앙갚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화목을 이룹니다. 모세는 자신을 비방하다 나병이 발한 누님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끌어안고 기도의 자리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렇게 복된 온유한 마음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우리는 두 가지 길을 찾았습니다. 하나는 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생각하면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이 우리들에게로 흘러들어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있게 하고, 입술에 있게 하고, 걷는 발걸음 위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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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사람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누가 물으면 여러분은 어떤 답을 내놓겠습니까? “온유한 마음으로 단장하면 넓은 땅을, 기름진 땅을 선물 받습니다.” 라고 해석하시겠습니까? “경치가 좋은 곳에 예쁜 정원까지 갖춘 집을 갖게 됩니다.”라고 해석을 하시겠습니까?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해 아래 살면서 더 크게 되고, 더 많이 갖게 된다는 뜻입니까?
저는 이 부분이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을 단 한 구절로 그려내는데,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2:52) 지혜와 키가 함께 자라는 것이 복된 것처럼, 하늘의 하나님에게도 사랑받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이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소년시절의 모티브는 사무엘에게 있습니다. 실로 성막 뜰에서 예배의 에봇을 입고 자라는 소년 사무엘의 모습을 이렇게 담아냅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삼상2:26) 이렇게 하나님께 은총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은총을 받는 사무엘의 모습이 이렇게도 그려집니다. “사무엘이 자라는데,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함께 하셔서, 사무엘이 한 말이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땅의 가장 북쪽 마을 단에서부터 가장 남쪽 마을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사무엘을 하나님의 선지지로 세우셨음을 인정하여, 그 땅에 모든 백성들이 존중하고, 사랑하고,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닐까요? 온유한 마음, 여러분의 마음이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은 온유한 사람의 복이 여러분의 복이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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