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나누기

2023. 08. 20.(주일낮) 니고데모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3-08-19 10:31
조회
879
제목: 니고데모
성경: 요한 3: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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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여름사역이 펼쳐졌던 지난 여섯 주간동안, 스가랴선지자가 펼쳐 보여주었던 네 가지 환상을 살펴보았습니다. 골짜기 한가득 화석류 숲이 펼쳐지고 숲 한가운데 붉은 말을 타신 주님을 뵈었고, 예루살렘의 너비와 길이를 재러가는 측량줄을 잡은 천사도 만나보았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서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는 장면을 만나보았고, 하나님이 임재 하시어 그의 백성들을 보살피신다는 순금등잔대도 만나보았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펼쳤던 환상뿐만 아니라 선포하였던 메시지에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여호와의 날, 성도들이 덧입게 될 모습이 참 복되고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시는데 자기 양떼를 돌보듯 하시고, 이스라엘을 높이시는데 왕관의 보석같이 존귀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아름답게 하시는데 햇포도주로 피어나는 아가씨처럼 아름답게 하시겠답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스가랴선지자는 “봄비”에다 담아냅니다. 패어난 밀과 보리를 잘 영글게 하기 위해서, 수고의 땀방울을 알알이 열매로 영글게 하기 위해서 봄비를 내려주시는 분이 바알이 아니고 여호와이십니다. 그 분께 비를 구하십시오. 모자람도 없고, 부족함도 없는 소낙비로 응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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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여섯 시간동안 스가랴서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와서 3장 말씀을 읽었습니다. 먼저 오늘 읽은 3장 말씀을, 2장 말씀에 잇대어 놓겠는데요, 2장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시는 표적을 두 가지로 담아냅니다.

갈릴리 가나라는 마을에서 혼례가 있었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를 받았습니다. 즐거운 잔치가 한참 무르익어가고 있었는데,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알렸고,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당부합니다. “이 분이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정결 예식을 위해서 마당가에 놓여 있는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하셨고, 하인들이 아구까지 채웁니다. 주님은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명령하셨고,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본 사람들은 신랑을 칭찬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장면이 바뀝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이란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십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로 인해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로 인하여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의분을 느끼신 주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를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주는 사람의 상도 둘러 엎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제 생각인데요, 니고데모는 바람에 실려 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란 사람이 가나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데, 헛소문이겠지? 아니 물로 된 포도주를 맛 본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데?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사건을 목격한 것입니다.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니고데모는 두 눈으로 직접 보았고,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두 귀로 직접 들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지를 않았고, 그런 예수님의 음성이 귓가에서 사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한 밤중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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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는 침이 마르도록 예수님을 칭송합니다. “저는 율법을 열심히 공부해서 유대인의 랍비가 되어 존경을 받는데, 선생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랍비입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심에 분명합니다. 선생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선생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일을 보았는데요,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님이 아니시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니시고는 이런 표적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니고데모를 향하여 예수님은 가장 본질적인 답을 내놓으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님인 내가 하고자하는 것,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어 표적을 나타내시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거듭나야 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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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난다.”는 것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거듭 난다.”는 말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날이면 날마다 노름에 빠져 삽니다. 노름에 빠져 살다가 가산을 탕진하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그 후에야 잘못을 깨닫고 결심합니다. 앞으로는 화투장을 들지 않으리라. 노름하던 손으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을 두고 “저 양반, 새사람이 됐네! 거듭났구먼!” 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주색잡기로 세월을 보냅니다. 주색잡기로 세월을 보내니 집안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술을 끓고 올바른 생활을 하면 “저 양반 새사람이 되었구먼, 거듭났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듭 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 것, 그 이상입니다, 잘못된 생활 방식을 바로 잡는 것, 그 이상입니다. 잘못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 그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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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다는 것은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삶의 주소가 바뀌는 것입니다. 어둠을 좋아하던 사람이 빛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사람이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소속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던 사람이 하나님을 모신 사람으로,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분이 바뀌고, 소속이 새롭게 되고, 삶의 방향과 가치관이 새로워지는 것을 거듭난다고, 새로 난다고, 하늘로부터 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하늘보좌를 비우시고 베들레헴 말구유에 태어나신 이유,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을 드릴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삶을 펼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나는 길을 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를 세우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이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문을 열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복음이 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땅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께서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을 하셨고, 제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앎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하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이 되신 것, 복음을 가득히 담은 성경을 주신 것, 성경을 기초로 하여 마을마다 고을마다 교회가 세워진 것, 모든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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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거듭남의 신비”를 왜 하필이면 니고데모와 마주 앉으신 자리에서 펼쳐 놓으셨을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본 사람들을 향하여, 물이 포도주로 변함과 같이 여러분도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있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라고 선포하셨으면 거듭남의 신비를 더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요한복음 4장으로 가면, 야곱의 우물가가 무대로 펼쳐집니다. 사마리아 여인, 남편을 다섯씩이나 갈아치우면서 육체의 욕망을 채워보려 했던, 갈급한 인생인 사마리아 여인을 향하여 거듭남의 신비, 하늘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신비를 펼치는 것이 니고데모와 마주한 자리보다 더 극적일 것 같은데 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마주한 자리에서 거듭남의 신비를 펼쳐놓으신 것일까요? 오병이어의 기적이 펼쳐졌던 벳세다 들녘이든지, 예수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셨던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거듭남의 신비를 펼쳐놓으신 것이 더 좋았을 법한데, 한 밤 중 니고데모와 마주 앉아서 거듭남의 신비를 펼쳐놓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 번째 표적이 펼쳐지던 갈릴리 가나의 혼인집,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선물되던 야곱의 우물가, 오병이어의 기적이 펼쳐지던 베세다 들녘, 예수님의 몸에 향유가 부어졌던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거듭남의 신비를 펼쳐놓으셨으면 더 극적이고, 더 효과적이고, 더 풍성하게 전달되었을 것 같은데, 왜 예수님은 한 밤 중 니고데모와 마주 앉아서 거듭남의 신비를 펼쳐놓으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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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니고데모를 만나보아야 합니다. ①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속과 겉이 다르고, 내용보다 형식에 치우치다가 예수님에게 책망을 받았지만, 현대인들이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로 종교적인 열심히 있었습니다. 마늘 열 뿌리를 캐도 한 뿌리를 십일조를 성별하고, 상추 열 닢을 따도 한 닢을 성별하여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은 꼭 금식을 하였고, 성경말씀이 빼곡히 적힌 겉옷을 입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에서도 기도시간에 되면 하늘 향하여 손을 펼치고 기도하였던 사람들이 바리새인입니다.

②니고데모는 관원, 산헤드린 의회 의원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로마에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이지만, 유대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고위관료들이 있었습니다. 70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의회의 의원들입니다. 산헤드린 의회에서 법을 만들기도 하고, 법을 집행하기도 하고, 법을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도 했는데, 그 70명 중에 한 사람이 니고데모입니다.

③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랍비라고 합니다. 율법을 열심히 공부하여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품에서 율법이 배어나고, 생활에서 율법의 향기가 풍기기에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안식일이 돌아오면 회당에서 율법을 강론하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④니고데모는 돈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사도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달라고 요구하고, 예수님의 시신에다 향품을 바르고, 세마포로 싸고, 무덤에 모시며 장례를 치룬 고마운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고, 다른 한 분이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 100근쯤 가져온 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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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니고데모는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구별된 삶을 사는 바리새인, 율법에 해박한 랍비, 산헤드린 의원 중에 한 사람인 고위 관료, 물질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부자, 그런 니고데모를 행하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런 뜻입니다. 종교적인 열심이 없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니고데모처럼 종교적인 열심이 있는 사람도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을 배우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율법의 선생이 된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민초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은 물론이지만 니고데모처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물론이지만 니고데모처럼 부자들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기에 주님은 완벽남인 니고데모, 무엇하나 부족함도 없고, 모자람도 없었던 니고데모를 향하여 거듭남의 신비를 펼쳐놓으신 것입니다. 완벽남인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했으니 완벽남이 아닌 나도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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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니고데모의 사람됨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에는 “니고데모”란 이름에 초점을 맞추어봅시다. 니고데모는 “승리”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니케”와 “백성”이란의 뜻을 가진 “데모스”가 합하여 “니고데모”가 되었습니다. “승리한 백성”이란 뜻을 지닌 “니고데모”란 이름이 말하고자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승리하는 백성인지, 어떤 인생이 승리하는 인생인지를 일러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이렇게 간증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쌓아놓고 넓은 땅을 차지하면 그것이 승리하는 백성, 승리하는 인생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밑바닥에서부터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다 보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세상 끝을 바라보면 그것이 승리하는 백성, 승리하는 인생인 줄 알았습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차곡차곡 선행을 쌓아올리면 마침내 하늘에 닿고, 하늘에 닿으면 그것이 승리하는 백성, 승리하는 인생인 줄 알았습니다. 배우고 또 배우면 학문은 나의 고매한 인품이 되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깨우치며 선한 영향력이 되면 그것이 승리하는 백성, 승리하는 인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이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니고데모”란 이름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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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고 있는 “니고데모”가 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만 등장을 하는데, 모두 세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 등장하는 것이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한 밤중 예수님을 찾아왔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늘 백성이 됩니다.

두 번째는 요한복음 7장 말씀에 등장합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예수님 행하시는 표적을 보면서, 예수님이 가르쳐주는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선지지가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환호하는가 하면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 촌 동네에서 나온단 말이냐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논쟁이 산헤드린 의회로 옮겨 붙은 것입니다. 대부분의 의원들은 예수가 백성들을 미혹하고 있으니, 체포하여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니고데모가 소수의견을 냅니다. “그 분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그 분이 행하시는 표적을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정죄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편을 듭니다.

세 번째는 요한복음 19장 말씀에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위에서 돌아가셨고, 사도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장례를 모셨던 두 분이 있는데 한 분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고, 다른 한 분이 니고데모입니다.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달라고 요구하였고, 아리마대 요셉은 고운 세마포로 가져왔고,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몸에 부어드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져왔습니다.

성경은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의 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 리트라, 33kg입니다. 향품 치고는 어마어마한 분량이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고가의 향품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죽음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예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흔적이 있기에 높은 지위를 가지고 예수님 편이 되어주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흔적이 있기에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향품을 가지고 주님을 높여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니고데모로 복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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