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1.(주일낮) 마리아의 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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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2-12-09 11:40
조회
1006
제목: 마리아의 찬송
성경: 누가복음 1: 46- 56
1
대강절 첫 번째 주일, 누가복음이란 무대가 열리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람, 사가랴를 만났었습니다. 아론의 후손으로 백성들의 눈물과 아픔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를 백성들에게로 가져오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사가랴가 속해 있는 아비야 반열이 예루살렘 성전 제의를 한 주간 담당하게 되었고, 영광스럽게도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을 할 수 있도록 제비에 뽑혔습니다.
그 날의 복된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그려냅니다.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누가1:9) 더 복된 것은 분향 할 때 주의 천사가 향단 우편에 나타납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누가1:13) “요한의 태어남으로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많은 사람들도 그의 태어남으로 기뻐하리라.”(누가1:14)
2
대강절 두 번째 주일, 마리아를 만났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를 찾아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도다.”(누가1:28) 마리아가 놀라워하자 천사는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 예수라. 그 분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분은 다윗의 왕위를 가지고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리실 만왕의 왕이시라.”
마리아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설득합니다. “성령님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리라.”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라. 생리적으로는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나이인데 잉태하여 벌써 여섯 달이 되지 않았느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순종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3
마리아는 서둘러서 짐을 꾸렸고, 유대 산골 마을에 있는 엘리사벳의 집을 방문합니다. 마리아가 수줍은 듯 싸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반백의 엘리사벳이 버선발로 뛰어 나옵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축복하였고, 마리아는 하늘을 우러러 감격의 찬송을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나이다.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으니, 오고 오는 세대들이 나를 복이 있다고 하리로다.”
그날 유대 산골마을, 소박하고 작은 뜰에 울려 퍼진 “마리아의 찬송”은 오늘 우리가 부르는 모든 찬송의 원형입니다. 성경 속에는 수많은 찬송들이 담겨 있습니다. 깊은 바다를 마른 땅같이 건넌 이스라엘이 홍해 언덕 위에서 부른 찬송이 복되고, 아이를 낳지 못함으로 은혜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 있다가 기도하여 얻은 아들을 주님의 성막에 드리면서 부른 한나의 찬송도 복됩니다. 감옥의 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풀리는 바울과 실라의 한 밤중 찬송도 능력이 있고, 천국 문이 열리면서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이 구원받은 백성들과 함께 부르는 할렐루야 찬송은 장엄합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찬송을 한 편만 뽑으라면 오늘 우리가 읽은 “마리아의 찬송”을 뽑습니다.
마리아의 찬송은 악보의 음정과 박자를 정확하게 맞춘 그런 찬송을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방인의 땅이라고 멸시를 받던 갈릴리 나사렛, 촌 동네에서 자란 시골 처녀의 찬송이니 말입니다. 화려한 무대가 펼쳐지고, 궁중악사들의 공교한 선율에 맞추어서 부른 찬송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싯딤나무 한 그루 서있고, 작은 돌담이 둘러쳐져 있는 소박한 뜰에서 부른 찬송입니다. 그럼에도 가장 아름다운 찬송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4
주님으로 인해서 변화된 신분을 기뻐하며 찬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을 부르는 마리아를 좀더 자세히 만나봅시다. 마리아는 예루살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늘진 땅 갈릴리 나사렛 사람입니다. 성서 속에서 마리아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없으니 평범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좋은 학교에 진학해서 훌륭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와 약혼한 요셉도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탁월한 사람이 아닙니다. 손에 굳은살이 박혀있는 목수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엘리사벳의 축복처럼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함으로 “주의 어머니”로 신분이 복되고 아름답게 변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변화된 신분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천한 자를 높이시되 이제부터 모든 백성들이 가장 복을 받은 여인이라고 칭송하게 되었고, 주리는 자를 배불리시되 그냥 배를 불리시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도다.”
5
이런 찬송을 마리아보다 훨씬 먼저 불렀던 분이 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입니다. 한나에게는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는 좋은 남편이 있었습니다. 살림살이도 넉넉하여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릴 때면 소를 예물로 드렸습니다. 한나의 몸에 장애가 있거나 약점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큰 슬픔에 잠겨 마음을 찢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한나가 살던 시대, 자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울타리 밖으로 밀려났다는 징표였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셨고, 들으셨을 뿐만 아니라 권고하셨습니다. 사무엘을 낳았고, 약속한대로 젖을 뗀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던 날, 한나는 성막뜰에서 하나님을 높여 찬양합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나이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셨나이다.”(삼상2:1)
하나님의 은총권 밖으로 밀려났다 생각하니, 좋은 남편으로 인하여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권 밖으로 밀려났다 생각하니, 많은 재물로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잉태하여 하나님의 은총권 안으로 들어와 보니, 거름더미 속에서 일으키시는 주님의 손길이 너무나도 감사하여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나이다.
6
주님으로 인하여 변화된 신분을 찬송하는데 마리아보다도 먼저 불렀던, 한나보다도 먼저 불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홍해 언덕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애굽을 떠나온 이스라엘은 광야에 갇힌바 되었습니다. 앞에는 홍해바다가 길을 가로막았고, 뒤에는 600승의 병거를 앞세우고 바로가 진을 쳤습니다.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하면서 원망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 모세는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모세의 믿음대로 이스라엘 앞에 있던 구름기둥은 뒤로 옮겨져 애굽 군대의 접근을 막았고, 밤새도록 동풍을 불게 하시더니 깊은 바닷물이 좌우의 벽이 되면서 바다는 길을 냅니다. 이스라엘은 마른 땅과 같이 홍해를 건넜고, 뒤따르던 애굽 군대는 바닷물이 합하여지면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스라엘은 구원의 언덕에서 감격의 찬송을 부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오 나의 노래시라.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찬송이시라.”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어 영광을 나타내시고, 권능의 손으로 애굽 군대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1-6)
7
유다 산골마을 엘리사벳의 뜰에서 부른 마리아의 찬송이 나의 찬송이고, 실로에 있는 성막 뜰에서 부른 한나의 찬송이 나의 찬송이고, 홍해 언덕에서 이스라엘이 부르는 찬송이 나의 찬송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신분의 변화되었고, 삶의 자리가 변화되었고, 삶의 푯대가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예수님 밖에 있던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어있던 사람입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마귀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온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되었습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 저도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결혼하실 때 농사꾼인데 땅 한 평이 없으셨고, 오두막 한 채가 없으셔서 남의 집 사랑방 한 칸을 얻어서 살림을 시작하셨지만 화전을 일구시면서도 성실하셨고, 가난하시지만 진실하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저를 향한 아버지의 꿈이 있으셨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엄두도 못 내셨고, 소사일 하시는 학교아저씨가 됐으면 좋겠다. 면서기는 엄두도 못 내셨고, 리서기를 했으면 좋겠다.” “리서기”를 아는 분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실거예요. 저 어릴 적에 마을의 이장님은 존경받는 분이셨습니다. 나라에서 월급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해마다 농사가 끝나면 집집마다 쌀 한 말씩 모으면 열대여섯 가마니가 이장님의 연봉이었습니다. 그 시절 이장님 밑에서 사무실을 지키며 잡다한 일을 하고, 이장님 연봉에서 쌀 몇 가마니 떼어주는 것이 월급인 리서기를 했으면 하는 것이 저를 향한 아버지의 꿈이셨습니다. “저를 향한 아버지의 바람이 너무 작았다든지, 너무 시시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화전민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셨으면 아들이 리서기라도 하고, 잘 보여서 면서기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셨던 아버지의 마음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플 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회자가 되었고, 매 주일마다 성도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좋은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리사무소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큰 안디옥 뜰에서 뜰지기가 되어 예배당 문도 열고 닫고, 보일러를 틀기도 하고 끄기도 하고, 빗자루 들고 청소도 하고, 성도들도 기쁜 마음으로 만나는 뜰지기가 되었으니 아버지의 소박한 꿈이 더 크게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저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마리아의 찬송처럼 비천한 저를 주님은 높이셨고, 나의 배를 부르게 하시는데 좋은 것으로, 하늘에서 신령한 것으로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8
제가 이런 은혜를 덧입은 것은 하늘 보좌를 비우신 주님께서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베들레헴 말구유에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피고름 나는 문둥이의 몸에 손을 얹으시어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흰 눈같이, 양털같이 성결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뜰임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진, 분노하는 군중들에게 에워싸인 채 죽음과 마주하고 있는 여인에게서 죄와 사망의 그림자를 걷어내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우리에게서 죽음을 걷어내고 영원한 생명을 부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을 만나시자,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깁니다. 눈에 바르시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밝은 눈을 선물주십니다. 우리를 어둠에서 구원하여 생명의 빛 가운데로 걸어가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달리달굼” 선포하시고, 주검이 되어 상여에 실린 젊은이를 행하여 “청년아 일어나라.”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은 우리를 죽은 땅에서 산 자의 땅으로 옮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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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주가 되시는 아기 예수님을 몸속에 잉태한 마리아는 주님을 높여 찬양을 드리는데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구주를 기뻐하는데 마음이 구주를 기뻐합니다.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주님을 찬양하는데 영혼으로 찬양하고, 주린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주님을 기뻐하는데 마음으로 기뻐합니다.
슬픔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를 띠우신 주님을 마리아처럼 찬양하려면 이런 마음은 안 됩니다. 사막을 에덴같이,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같이 바꾸어주신 주님을 찬양하려면 이런 마음은 안 됩니다.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주신, 슬픔 대신에 찬송의 옷을 입혀주신 주님을 기뻐하며 찬송하려면 이런 마음은 안 됩니다. 어떤 마음인지 성경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10
요즈음 새벽기도회 시간에 히브리서를 읽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저희들을 향하여 “하늘에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복된 부름입니까? 마리아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아기 예수님을 잉태함으로 거룩한 형제가 된 것처럼 우리도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영접함으로 거룩한 하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을 향하여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이 있는데 완고한 마음입니다. 성경은 어떤 마음은 완고하다고 할까요? 하나님의 은혜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게 여기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은 완고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광야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 같이 건넜고, 아침마다 만나를 거두고, 반석에서 나는 샘을 마시면서도 글쎄 씨앗을 뿌릴 땅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석류와 무화과가 없다고 원망합니다. 어느 정도로 불평하고 원망하는가? 애굽에서 장자들이 죽던 날 같이 죽었더라면 더 좋았겠다고, 애굽 군대가 홍해에서 죽던 날 함께 죽었더라면 더 좋았겠다고, 놀라운 구원의 은총마저도 악평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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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을 향하여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이 있는데 악한 마음입니다. 성경은 어떤 마음을 악한 마음이라고 합니까? 믿지 아니하는 마음이 악한 마음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입에 넣어 맛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악한 마음입니다. 그러면 악한 마음이 반대인 선한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선한 마음이고, 선한 마음이 주님을 바라보면서 영혼으로 찬송하고, 마음으로 주님을 기뻐합니다. 마리아의 마음이 오늘 우리의 마음이고, 마리아의 찬송이 오늘 우리들의 찬송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 누가복음 1: 46-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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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절 첫 번째 주일, 누가복음이란 무대가 열리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람, 사가랴를 만났었습니다. 아론의 후손으로 백성들의 눈물과 아픔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를 백성들에게로 가져오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사가랴가 속해 있는 아비야 반열이 예루살렘 성전 제의를 한 주간 담당하게 되었고, 영광스럽게도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을 할 수 있도록 제비에 뽑혔습니다.
그 날의 복된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그려냅니다.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누가1:9) 더 복된 것은 분향 할 때 주의 천사가 향단 우편에 나타납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누가1:13) “요한의 태어남으로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많은 사람들도 그의 태어남으로 기뻐하리라.”(누가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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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절 두 번째 주일, 마리아를 만났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를 찾아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도다.”(누가1:28) 마리아가 놀라워하자 천사는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 예수라. 그 분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분은 다윗의 왕위를 가지고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리실 만왕의 왕이시라.”
마리아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설득합니다. “성령님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리라.”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라. 생리적으로는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나이인데 잉태하여 벌써 여섯 달이 되지 않았느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순종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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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서둘러서 짐을 꾸렸고, 유대 산골 마을에 있는 엘리사벳의 집을 방문합니다. 마리아가 수줍은 듯 싸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반백의 엘리사벳이 버선발로 뛰어 나옵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축복하였고, 마리아는 하늘을 우러러 감격의 찬송을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나이다.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으니, 오고 오는 세대들이 나를 복이 있다고 하리로다.”
그날 유대 산골마을, 소박하고 작은 뜰에 울려 퍼진 “마리아의 찬송”은 오늘 우리가 부르는 모든 찬송의 원형입니다. 성경 속에는 수많은 찬송들이 담겨 있습니다. 깊은 바다를 마른 땅같이 건넌 이스라엘이 홍해 언덕 위에서 부른 찬송이 복되고, 아이를 낳지 못함으로 은혜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 있다가 기도하여 얻은 아들을 주님의 성막에 드리면서 부른 한나의 찬송도 복됩니다. 감옥의 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풀리는 바울과 실라의 한 밤중 찬송도 능력이 있고, 천국 문이 열리면서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이 구원받은 백성들과 함께 부르는 할렐루야 찬송은 장엄합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찬송을 한 편만 뽑으라면 오늘 우리가 읽은 “마리아의 찬송”을 뽑습니다.
마리아의 찬송은 악보의 음정과 박자를 정확하게 맞춘 그런 찬송을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방인의 땅이라고 멸시를 받던 갈릴리 나사렛, 촌 동네에서 자란 시골 처녀의 찬송이니 말입니다. 화려한 무대가 펼쳐지고, 궁중악사들의 공교한 선율에 맞추어서 부른 찬송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싯딤나무 한 그루 서있고, 작은 돌담이 둘러쳐져 있는 소박한 뜰에서 부른 찬송입니다. 그럼에도 가장 아름다운 찬송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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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으로 인해서 변화된 신분을 기뻐하며 찬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을 부르는 마리아를 좀더 자세히 만나봅시다. 마리아는 예루살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늘진 땅 갈릴리 나사렛 사람입니다. 성서 속에서 마리아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없으니 평범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좋은 학교에 진학해서 훌륭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와 약혼한 요셉도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탁월한 사람이 아닙니다. 손에 굳은살이 박혀있는 목수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엘리사벳의 축복처럼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함으로 “주의 어머니”로 신분이 복되고 아름답게 변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변화된 신분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천한 자를 높이시되 이제부터 모든 백성들이 가장 복을 받은 여인이라고 칭송하게 되었고, 주리는 자를 배불리시되 그냥 배를 불리시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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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찬송을 마리아보다 훨씬 먼저 불렀던 분이 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입니다. 한나에게는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는 좋은 남편이 있었습니다. 살림살이도 넉넉하여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릴 때면 소를 예물로 드렸습니다. 한나의 몸에 장애가 있거나 약점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큰 슬픔에 잠겨 마음을 찢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한나가 살던 시대, 자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울타리 밖으로 밀려났다는 징표였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셨고, 들으셨을 뿐만 아니라 권고하셨습니다. 사무엘을 낳았고, 약속한대로 젖을 뗀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던 날, 한나는 성막뜰에서 하나님을 높여 찬양합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나이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셨나이다.”(삼상2:1)
하나님의 은총권 밖으로 밀려났다 생각하니, 좋은 남편으로 인하여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권 밖으로 밀려났다 생각하니, 많은 재물로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잉태하여 하나님의 은총권 안으로 들어와 보니, 거름더미 속에서 일으키시는 주님의 손길이 너무나도 감사하여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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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으로 인하여 변화된 신분을 찬송하는데 마리아보다도 먼저 불렀던, 한나보다도 먼저 불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홍해 언덕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애굽을 떠나온 이스라엘은 광야에 갇힌바 되었습니다. 앞에는 홍해바다가 길을 가로막았고, 뒤에는 600승의 병거를 앞세우고 바로가 진을 쳤습니다.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하면서 원망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 모세는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모세의 믿음대로 이스라엘 앞에 있던 구름기둥은 뒤로 옮겨져 애굽 군대의 접근을 막았고, 밤새도록 동풍을 불게 하시더니 깊은 바닷물이 좌우의 벽이 되면서 바다는 길을 냅니다. 이스라엘은 마른 땅과 같이 홍해를 건넜고, 뒤따르던 애굽 군대는 바닷물이 합하여지면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스라엘은 구원의 언덕에서 감격의 찬송을 부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오 나의 노래시라.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찬송이시라.”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어 영광을 나타내시고, 권능의 손으로 애굽 군대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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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산골마을 엘리사벳의 뜰에서 부른 마리아의 찬송이 나의 찬송이고, 실로에 있는 성막 뜰에서 부른 한나의 찬송이 나의 찬송이고, 홍해 언덕에서 이스라엘이 부르는 찬송이 나의 찬송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신분의 변화되었고, 삶의 자리가 변화되었고, 삶의 푯대가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예수님 밖에 있던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어있던 사람입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마귀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온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되었습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 저도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결혼하실 때 농사꾼인데 땅 한 평이 없으셨고, 오두막 한 채가 없으셔서 남의 집 사랑방 한 칸을 얻어서 살림을 시작하셨지만 화전을 일구시면서도 성실하셨고, 가난하시지만 진실하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저를 향한 아버지의 꿈이 있으셨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엄두도 못 내셨고, 소사일 하시는 학교아저씨가 됐으면 좋겠다. 면서기는 엄두도 못 내셨고, 리서기를 했으면 좋겠다.” “리서기”를 아는 분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실거예요. 저 어릴 적에 마을의 이장님은 존경받는 분이셨습니다. 나라에서 월급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해마다 농사가 끝나면 집집마다 쌀 한 말씩 모으면 열대여섯 가마니가 이장님의 연봉이었습니다. 그 시절 이장님 밑에서 사무실을 지키며 잡다한 일을 하고, 이장님 연봉에서 쌀 몇 가마니 떼어주는 것이 월급인 리서기를 했으면 하는 것이 저를 향한 아버지의 꿈이셨습니다. “저를 향한 아버지의 바람이 너무 작았다든지, 너무 시시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화전민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셨으면 아들이 리서기라도 하고, 잘 보여서 면서기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셨던 아버지의 마음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플 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회자가 되었고, 매 주일마다 성도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좋은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리사무소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큰 안디옥 뜰에서 뜰지기가 되어 예배당 문도 열고 닫고, 보일러를 틀기도 하고 끄기도 하고, 빗자루 들고 청소도 하고, 성도들도 기쁜 마음으로 만나는 뜰지기가 되었으니 아버지의 소박한 꿈이 더 크게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저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마리아의 찬송처럼 비천한 저를 주님은 높이셨고, 나의 배를 부르게 하시는데 좋은 것으로, 하늘에서 신령한 것으로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8
제가 이런 은혜를 덧입은 것은 하늘 보좌를 비우신 주님께서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베들레헴 말구유에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피고름 나는 문둥이의 몸에 손을 얹으시어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흰 눈같이, 양털같이 성결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뜰임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진, 분노하는 군중들에게 에워싸인 채 죽음과 마주하고 있는 여인에게서 죄와 사망의 그림자를 걷어내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우리에게서 죽음을 걷어내고 영원한 생명을 부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을 만나시자,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깁니다. 눈에 바르시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밝은 눈을 선물주십니다. 우리를 어둠에서 구원하여 생명의 빛 가운데로 걸어가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달리달굼” 선포하시고, 주검이 되어 상여에 실린 젊은이를 행하여 “청년아 일어나라.”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은 우리를 죽은 땅에서 산 자의 땅으로 옮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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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주가 되시는 아기 예수님을 몸속에 잉태한 마리아는 주님을 높여 찬양을 드리는데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구주를 기뻐하는데 마음이 구주를 기뻐합니다.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주님을 찬양하는데 영혼으로 찬양하고, 주린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주님을 기뻐하는데 마음으로 기뻐합니다.
슬픔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를 띠우신 주님을 마리아처럼 찬양하려면 이런 마음은 안 됩니다. 사막을 에덴같이,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같이 바꾸어주신 주님을 찬양하려면 이런 마음은 안 됩니다.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주신, 슬픔 대신에 찬송의 옷을 입혀주신 주님을 기뻐하며 찬송하려면 이런 마음은 안 됩니다. 어떤 마음인지 성경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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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새벽기도회 시간에 히브리서를 읽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저희들을 향하여 “하늘에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복된 부름입니까? 마리아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아기 예수님을 잉태함으로 거룩한 형제가 된 것처럼 우리도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영접함으로 거룩한 하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을 향하여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이 있는데 완고한 마음입니다. 성경은 어떤 마음은 완고하다고 할까요? 하나님의 은혜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게 여기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은 완고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광야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 같이 건넜고, 아침마다 만나를 거두고, 반석에서 나는 샘을 마시면서도 글쎄 씨앗을 뿌릴 땅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석류와 무화과가 없다고 원망합니다. 어느 정도로 불평하고 원망하는가? 애굽에서 장자들이 죽던 날 같이 죽었더라면 더 좋았겠다고, 애굽 군대가 홍해에서 죽던 날 함께 죽었더라면 더 좋았겠다고, 놀라운 구원의 은총마저도 악평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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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을 향하여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이 있는데 악한 마음입니다. 성경은 어떤 마음을 악한 마음이라고 합니까? 믿지 아니하는 마음이 악한 마음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입에 넣어 맛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악한 마음입니다. 그러면 악한 마음이 반대인 선한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선한 마음이고, 선한 마음이 주님을 바라보면서 영혼으로 찬송하고, 마음으로 주님을 기뻐합니다. 마리아의 마음이 오늘 우리의 마음이고, 마리아의 찬송이 오늘 우리들의 찬송이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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