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나누기

2022. 07. 17 (주일낮) 형통의 옷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2-07-15 12:00
조회
1058
제목, 형통의 옷
성경, 창세기 39 : 1 - 6

1
요셉의 이야기는 “옷”을 연결고리로 펼쳐집니다. 곱고 화려한 채색 옷을 입고 성서 속에 등장을 하는데, 채색 옷이 벗겨지면서 노예의 옷을 입고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노예의 신분임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니,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총무의 옷을 입게 됩니다. 성결을 지키려다가 총무의 옷이 벗겨지면서 죄수의 옷을 입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어 감옥의 제반 사무를 도맡게 됩니다. 때가 이르매 술 맡은 관원장의 소개로 바로의 꿈을 해석하면서 세마포 옷을 입고, 금 사슬 목에 걸고, 인장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버금수레에 올라 칠 년 흉년의 때에 만민의 생명을 구원합니다.

그러고 보면 요셉은 “총무”가 평생의 직업이었습니다. 노예의 신분임에도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대소사를 도맡은 총무의 옷을 입었고, 죄수의 신분임에도 감옥에 제반 사무를 도맡은 사무총장의 옷을 입었고, 애굽인이 아니고 히브리인임에도 큰 나라의 살림살이, 그것도 7년 흉년의 때를 이겨내야 국무총리의 옷을 입었습니다. 요셉이 평생 입었던 옷은 “총무의 옷”입니다.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의 옷을 입더니, 한 가정의 살림살이보다는 규모가 훨씬 큰 감옥 제반 사무를 도맡았고, 한 감옥의 살림살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집트라는 큰 나라를 경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첫째 형통의 옷을 입었습니다.(2절)
1
요셉이 총무의 옷을 입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내는 단어가 있습니다. “형통”, “형통의 옷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어” 보디발의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주인인 보디발의 눈에 비친 요셉의 모습, “여호와께서 요셉이 하는 모든 일을 형통케 하시는 것을 보았답니다.” 그래서 가정 총무의 일을 맡겼더니 그때로부터 여호와께서 보디발의 집에도 밭에도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살게 된 것을 “형통한 자가 되어” 형통의 옷을 입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곱고 화려한 채색 옷이 벗겨지고 노예의 옷을 입었는데, 그것을 형통하다고 할 수 있을까? 각별한 사랑이 담긴 채색 옷을 입고 살아왔던 요셉이 도리어 채색 옷을 입은 사람들을 시중드는 역할로 추락을 하였는데, 그것을 형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정든 고향이 싫어서 짐을 싸가지고 이민을 온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님들이 은 20을 받고 팔아먹어서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곳이 보디발의 집인데, 그것을 형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이렇게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든 교회들이 온라인 예배를 병행하게 되면서 캐나다에 있는 큰 아들의 설교도, 미국에 있는 작은 아들이 설교도 매주일 보고 듣게 되는데, 저희 큰 아들은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는데 은혜가 되었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개미”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성냥개비 6개를 가지고 정삼각형 4개를 만들어 보십시오.” 책상 위에 성냥개비 6개를 올려놓고, 아무리 움직여 보아도 정삼각형 4개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이때 힌트가 주어지는데, “다르게 생각하라.” 지금까지는 성냥개비 6개를 평면에 놓고 생각했는데, 평면에서 입체적으로 다르게 생각하자, 마치 피라미드의 삼각뿔처럼 쉽게 정삼각형 4개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팔려간 요셉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면적으로 보면 채색 옷이 벗겨지고 노예의 옷을 입어야 하는 신분의 추락, 정든 고향을 떠난 낯선 타향으로 팔려온 삶의 자리의 아픔, 채색 옷을 입고 각별한 사랑을 받던 자리에서 채색 옷 입은 사람들을 도리어 섬겨야 하는 역할의 고난, 형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현실을 평면적으로 보지 않고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입니다. 노예의 옷을 입고, 낯설고 물 설은 땅에서, 채색 옷 입은 사람들을 섬기며 허드렛 일을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그것이 형통이 아니겠습니까?

3
이렇게도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Good”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좋은”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선한”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복된”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Good”이라 하는 단어에서 “God” 하나님을 빼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o”, 제로가 남습니다.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o”에다 “God” 하나님을 더하면 무엇이 됩니까? “Good”이 됩니다.

노예의 옷을 입는 요셉, 제로입니다. 채색 옷은 찢어졌고, 형들은 자신을 팔아버렸고, 울타리 되었던 아버지와 정든 고향을 떠나야했던, 그래서 노예의 옷을 입고 있으니, 노예의 옷을 입은 요셉의 처지를 숫자로 나타내면 제로입니다. 그런데 누가 함께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십니다. “0”에 +God(=하나님)이 더해지니 좋은 인생, 복된 삶,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형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주간 새벽기도시간마다 이런 찬송을 불렀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 찬송을 노예의 옷을 입은 요셉이 보디발에 집에서 부르기도 했지만 요셉보다 먼저 불렀던 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4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오는데 은금과 가축이 심히 많은 큰 부자가 되어 올라옵니다. 길러야 할 가축은 심히 많은데 초지가 부족하였고, 목자들끼리 다투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제안을 합니다. “우리가 친족인데 다투어서야 되겠는가? 이참에 헤어지도록 하자. 자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자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롯이 먼저 선택권을 행사하는데 물이 넉넉한, 그래서 초지가 넓게 펼치지는 여호와의 동산과도 같고, 애굽 땅과도 같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합니다. 그날 롯의 선택은 수학공식으로 말하면 “Good-God=0” 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호와의 동산과 같이 기름졌지만 큰 죄인들이 모여 사는, 하나님께서 떠나신 땅이었습니다. 그 땅에 불과 유황이 내리던 날 롯은 모든 재물을 불 속에 던져 넣고 겨우 몸뚱이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도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덕분에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은 모래바람이 부는 황량한 땅입니다. 그러나 그곳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네 발길이 머무는 곳마다 다 네게 주리라. 네 자손을 땅의 티끌과 같이 많게 하리라.” 앞에서 만났던 수학공식 “0 + God = Good” 되었습니다. 그 날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서 제단을 쌓는데, 그 날 무슨 찬송을 불렀겠습니까?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 찬송이 아브라함의 찬송이고, 요셉의 찬송이었듯이 저와 여러분의 찬송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형통의 옷을 입으면 선한 영향력이 됩니다.(5절)
1
요셉이 노예의 옷을 입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형통한 자가 됩니다. 주인인 보디발이 노예인 요셉을 보니, 요셉이 하는 모든 일이 형통케 됩니다. 형통케 됨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기 때문인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보디발은 요셉에게 집안이 대소사와 모든 소유를 주관하게 하는 총무의 옷을 입혀줍니다. 그 후로 보디발의 집에 복이 내리는데 여호와의 복이 보디발의 집에도 내리고, 보디발의 밭에도 내립니다. 요셉이 형통의 옷을 입으니, 선한 영향력이 되어 모든 일을 복되게 하고, 좋은 영향력이 되어 모든 사람을 복되게 합니다.

2
“여호와의 복이 요셉으로 인하여 애굽 사람 보디발의 집에 임하였다.”는 메시지는 요셉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 요셉의 할아버지인 이삭, 요셉의 증조할아버지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믿음의 족장들의 DNA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가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창12:3)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어떻습니까? 어느 날 아비멜렉 왕이 브레인인 아훗삿과 군대장관인 비골을 데리고 이삭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안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는 것을 우리가 두 눈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당신과 친하게 지내면 여호와의 복이 당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기 때문입니다.”(창26:28-29) 이삭의 아들 야곱은 어떻습니까? 야곱이 형님의 분노를 피하여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을 쳤고, 외삼촌의 집에서 머슴을 살게 됩니다. 야곱이 머슴을 살면서 외삼촌의 집이 복을 받은데, 그것을 외삼촌인 라반이 인정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복을 내려 주시는데, 너로 말미암아, 너 야곱으로 말미암아 복을 내려주시는 줄을 내가 깨닫노라.”(창30:27)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되었고, 이삭으로 말미암아 그랄 땅에 복이 흘러들어왔고, 야곱으로 말미암아 외삼촌 라반의 집이 복을 받았던 것처럼 요셉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복이 보디발의 집에도 밭에도 복이 내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요셉을 복의 통로로 사용하셨던 하나님은 오늘 예배자로 선 우리 모두를 선한 영향력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3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죄악을 인하여 망하였으면 좋겠는데, 그들의 죄를 지적하여 회개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싫어도 너무 싫어서 동쪽으로 가야 니느웨인데, 정반대 방향인 서쪽으로 향합니다. 육로로 가면 니느웨인데, 배를 타고 다시스로 향합니다.

요나가 탄 배는 지중해 한 가운데서 큰 폭풍을 만나면서 배가 깨어지기 시작하고,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의 실었던 물건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그럼에도 풍랑은 여전하였고, 뱃사람들은 누구로 인하여 재앙이 임하였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습니다. 요나는 나로 인하여,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고 있는 자신으로 말미암아 풍랑이 임하였음을 인정하였고, 요나를 바다에 던지니 바다는 잔잔하여졌습니다.

4
선지자 요나가 살았던 시대와 사도 바울이 살았던 시대적인 상황은 다르지만 똑같은 지중해를 배경으로 합니다. 죄수의 몸으로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향하던 배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여러 날 동안 낮의 해도 밤의 별도 볼 수 없는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습니다. 사공들은 짐을 풀어 바다에 던졌고, 항해할 때 꼭 필요한 기구들까지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런 절망의 밤에 바울은 배 밑창으로 내려가서 무릎을 꿇었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겠고,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들도 다 네게 주노라.”(행27:24) 바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배 안에 타고 있는 276명의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아 멜리데 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요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바다에는 큰 풍랑이 임하였고, 뱃사람들은 절망으로 빠져듭니다. 그러나 바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276명의 뱃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복된 삶을 펼쳐 가는데, 오늘 말씀을 듣는 안디옥식구들이 요셉도 되시고, 바울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성결을 지켜내야 합니다.(9절)
1
요셉에게 총무의 옷을 입혀준 분의 인적 사항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보디발이고, 국적은 애굽 사람입니다. 그리고 맡은 직임은 “바로의 신하로서 친위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수 의견이긴 하지만 바로의 신하를 “환관”으로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환관은 어떤 분들입니까? 남자이기를 포기하고 임금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궁중 관료입니다. 그러고 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집요하게 유혹한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요셉은 17세 소년입니다. 용모는 빼어나고 아름답습니다. 총무의 옷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맘대로 부릴 수 있는 노예의 신분입니다. 그래서 눈짓으로 유혹하고, 잠자리를 함께 하자고 끈질기게 요구합니다.

2
요셉이 안주인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부가 되었다면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삶의 자리는 안전하고, 앞길은 한결 평탄하지 않았겠습니까? 바깥주인은 총무의 옷을 입혀주었는데 안주인마저 요셉을 품에 안아주니 삶의 자리는 더욱 안전하고, 앞길은 한결 평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거절하는 이유가 참 복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 바깥주인이신 보디발이 나를 믿어주어 총무의 옷을 입혀주고, 집안 살림을 다 맡겨주시면서 아무 것도 금하지 않았지만 안주인만은 금하게 하셨는데, 더더욱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형통의 옷을 입었는데,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그렇게 거절하므로 총무의 옷을 벗겨집니다. 몇 년 전 벗겨진 채색 옷에 염소의 피가 묻혀 지고, 아버지 야곱 앞에 던져지면서 요셉이 악한 짐승에 찢겨 죽음을 맞이했다는 거짓 증거품이 되었던 것처럼, 벗겨진 총무의 옷도 요셉의 안주인을 겁탈했다는 거짓증거품이 되었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요셉은 총무의 옷을 벗겨지더라고 성결의 옷은 지켜냈고, 죄수의 신분으로 추락하면서도 성결의 옷만은 지켜냈습니다.

3
요셉을 보고 있노라면 성결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은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리는데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요셉이 안주인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내세운 이유가 39절 하반절에 분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 여기에서 “큰 악”이란 바깥주인이 보디발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나를 노예로 사주신 분, 나를 믿어주시어 총무의 옷을 입혀주신 분, 다른 것은 마음대로 하면서 단 한 가지니 안주인만은 맘대로 할 수 없다고 줄을 쳐 놓았는데, 그것을 넘는다면 나를 믿어준 주인님을 배신하는 것이요, 크게 비난을 받을 일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음행을 저지르는 것은 하나님께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각별히 사랑해 주셔서 채색 옷을 입혀주셨고, 채색 옷이 벗겨지면서 죽음의 구덩이에 던져졌지만 건져내 주시고, 애굽으로 팔려왔지만 선한 길로 인도하여서 총무의 옷을 입혀 주셨는데, 지난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가득한데 어찌 그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리요.

지난 주간 새벽기도회에 읽은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성도가 음행하면 안 되는 이유를 받은 은혜를 헤아리면서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몸은 성부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몸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피값을 치르고 사셨기에 부활의 날을 기다리는 몸입니다.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전, 주님께 잇대어진 지체입니다.(고전6:19-20)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리면서 죄의 유혹을 뿌리치고, 성결의 옷을 입는 은혜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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