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나누기

2020. 9. 13(주일) 하나님이 하시는 일(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9-12 13:54
조회
1793
제목: 하나님이 하시는 일(2)
성경: 요한복음 9 : 35 - 38, 이사야 35 : 5 - 10

1
바디매오의 삶의 자리, “향기가 넘치는 마을, 여리고”입니다. 샘이 넘쳐나고, 풀향과 꽃향이 가득하고, 종려나무 열매가 익어가고, 오가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여리고”가 바디매오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시각장애를 안고 있어서 아름다운 마을을 볼 수 없었고,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천덕꾸러기기 되어 길거리에 버려진 채, 차가운 밤이슬로 몸이 젖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차이는, “성문 밖에 버려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날도 바디매오는 여리고 성문 밖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성문 밖 공기가 다른 날과 사뭇 다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예수님이 지나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디매오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십니다. “데려오라.”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주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밝은 눈이 되었습니다. 밝은 눈이 된 것 만해도 감격인데, 바디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십자가의 보혈이 흐르고 부활의 영광스러움이 준비되는 예루살렘으로 예수님과 함께 올라갑니다.(누가18:35-43)

2
오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나면서부터 시각장애를 입었고, 그 때 나이가 사십이라고 하였으니, 사십 년이라는 하는 긴 세월동안 빛을 보지 못한 채 어두움 속에 갇혀 지냈습니다. 이 시각장애인을 두고 제자들은 논쟁을 펼쳤고, 예수님에게 답을 구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시각장애를 입은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 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주님은 침을 뱉어 진흙을 이깁니다. 눈에 발라주십니다.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가서 눈을 씻고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3
예수님께서 시각장애인을 치료하시어 보게 하시는 이야기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치료하시는 방법이 사뭇 다릅니다. 바디매오를 고치실 때에는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에 걸음을 멈추십니다. “데려오라.”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십니다. “주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주님, 말씀하시니” 밝은 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십남”을 고치실 때는 여러 과정을 거칩니다. “사십남”, 처음 들어보는 이름지요, 제가 지은 이름입니다. 바디매오와 비교를 해야겠는데, 성서 속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아서, 그때 나이를 이름으로 지었습니다. 오늘 설교 속에서는 “사십남”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사십남”을 고치실 때는 여러 과정을 거칩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 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십니다. 물로 진흙을 이기셨으면 쉬우셨을 텐데,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십니다. 얼굴을 마주하시고는 보지 못하는 두 눈에 발라주십니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향하여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디매오에게처럼 “보아라!” 그렇게 말씀만하셨어도 눈이 열렸을 것입니다. 험한 풍랑을 향하여 “잠잠하라.” 말씀하시니 성난 파도는 잔잔하여졌고, 무덤 속에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시니 나사로가 베로 동인 채 무덤 밖으로 나왔는데, 바디매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보아라!” 그렇게 말씀만 하셨어도 사십남의 눈이 열렸을 텐데, 왜 주님은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시는 성가신 과정을 거치시고, 이긴 진흙을 눈에 발라주시는 번거로운 과정도 거치시고, 맹인을 향하여 실로암 연못까지 내려가서 씻고 오라는 힘든 과정을 거치시는 것일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바디매오”와 “사십남”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맹인으로 길거리에 버려진 인생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남으로 어둠이 벗겨지고 밝은 빛으로 가득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습니다. 어둔 눈을 가지고 있을 때 심령의 상태가 서로 다르고, 밝은 눈이 되었을 때의 겪게 되는 일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은 만나기 전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었고, 예수님 만난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고 일러주자 “다윗의 자손 예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십남”에게는 그런 믿음이 보이지 않기에 예수님은 먼저 자신을 소개합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

예수님을 만나서 밝은 눈이 된 후, 몸소 겪게 될 일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길거리 인생의 보물1호,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모습이 그려지지만 “사십남”은 아닙니다. “사십남”은 밝은 눈이 되었음에도 마을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시달리고, 결국은 출교를 당하는 어려운 일을 만나기에 “바디매오”보다 “사십남”에게 더 큰 은혜가 필요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침을 뱉으시고 진흙을 이기실 때 주님의 손놀림이 몸으로 느껴집니다. 가까이 다가오셔서 얼굴을 마주하시고는 이긴 진흙을 눈에 발라주시는데 주님의 부드러운 손길이 온 몸에 느껴지고, 주님의 체취가 온 마음에 스며듭니다. 주님의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함이 온 몸에 젖어듭니다.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실로암 연못으로 향하는 걸음걸음이 소망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이렇게 밝은 눈이 되는 과정 과정을 통하여 지워지지 않는 은혜의 흔적을 온 몸에 새겨 넣으신 것입니다. 밝은 눈이 되었을 때 마주해야 할 시련이 크기 때문입니다.

5
“사십남”이 밝은 눈이 된 후, 마주해야 했던 시련을 살펴봅시다.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밝은 눈이 된 “사십남”을 두고 마을 사람들이 두고 논쟁이 벌립니다. “기다.” “시각장애를 안고 태어나서 40년 동안 어둠에 갇혀 살던 기다. 어둠에 갇힌 채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이다.” “아니다 비슷하긴 한데 그 사람은 아니다. 체격이나 얼굴 생김새가 비슷하긴 하나 아니다. 아니 아침에 맹인이었는데, 점심을 먹고 나니까 밝은 눈이 되었다.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밝은 눈이 된 사람을 데려가 가운데 세우고 묻습니다. “기냐, 아니냐?”

“사십남”, 밝은 눈이 되는 과정에서 주님이 온 몸에 새겨주신 은혜가 있기에, 온 맘에 그려주신 은총이 있기에 이렇게 간증합니다.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기더니, 내 두 눈에 발라줍디다. 그리고는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겁니다. 그 분의 말씀대로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었더니 어둠이 걷히면서 밝은 눈이 되었습니다.”(요한9:11) 시련은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6
예수님께서 침으로 진흙을 이기시고, 두 눈에 발라주시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한 날이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절반은 “예수라는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니, 분명 죄인이다.” 안식일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긴 것, 이긴 진흙을 두 눈에 발라준 것, 씻기 위해서 실로암 연못까지 걸어간 것, 안식일을 범했으니 예수라는 사람도, “사십남”도 죄인이다. 그러나 절반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라면 어떻게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밝힐 수 있단 말인가? 예수라는 사람이 죄인은 아니다.” 의견이 팽팽하게 갈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사십남”을 불러서 묻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는데, 너는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사십남”, 밝은 눈이 되는 과정에서 주님이 온 몸에 새겨주신 은혜가 있기에, 온 맘에 그려주신 은총이 있기에 아주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그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보내신 선지자입니다.”(요한9:17) 시련은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7
바리새파 사람들이 “사십남”을 데려다가 회유하고 협박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예수라는 사람은 죄인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니 자네도 예수라는 사람이 죄인이라고 인정을 하라. 그렇지 않으면 자네를 출교시킬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출교는 종교적인 최고의 형벌입니다. 성전 출입이 평생 금지됩니다.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교제할 수도 없습니다. 죽었을 때 슬퍼하며 곡하는 것도 금지되는 사망선고와 같은 것이 출교입니다.

출교의 위협을 받고, 출교를 당하면서 “사십남”, 밝은 눈이 되는 과정에서 주님이 온 몸에 새겨주신 은혜가 있기에, 온 맘에 그려주신 은총이 있기에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나면서부터 40년 동안 시각장애란 무거운 멍에를 메고, 어둠 속에 갇혀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분이 내게서 어둠을 거두어내시고, 밝은 눈을 선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기도는 듣지 아니하시지만 경건한 사람의 기도는 들어주시는 줄을 아나이다. 그러니 내 눈을 밝혀 주신 예수라는 분은 결코 죄인이 아닙니다. 선지자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십니다.”(요한9:33)

“사십남”은 출교를 당하였고, 출교를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친히 찾아오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 “주여 그 분이 누구십니까? 제가 믿고자 하나이다.” “네가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여기에서 “사십남”의 복된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그리고 주님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요한9:35-38)

8
진흙을 이기시면서 주님의 손놀림을 느끼게 하시고, 진흙을 두 눈에 발라주시면서 주님의 숨결을 담아주시는 이유가 밝은 눈이 된 후에 만나게 될 시련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핍박과 시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사십남”이 밝은 눈이 된 후 마을로 돌아왔을 때 마을 사람들 앞에서 간증합니다.“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두 눈에 발라주었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씻었더니 보게 되었나이다. “사십남”이 바리새인들 앞에 섰을 때, 출교 선고를 받은 재판정에 섰을 때, “그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보내신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출교를 당한 후 주님을 다시 만났을 때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나이다.” 핍박과 시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십남”은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십남”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보지 못하는 눈이 보게 된 것, 큰 은혜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몸의 눈이 밝아진 것보다 더 큰 은혜는 마음의 눈이 열려서 영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입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 하늘 백성이 되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가장 큰 일입니다. 독생자를 보내시어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까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입니다.

9
두 주간동안 “사십남”의 눈을 밝혀주시는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골짜기를 지나는 우리들을 향하여 “때가 아직 낮입니다. 이 골짜기에서 우리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하는 낮입니다.” 우리의 손을 꼭 붙잡아 주셨습니다. 우리의 손을 붙잡아주신 주님은 말씀에 주십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골짜기에서도 내가 세상의 빛이니 나를 바라보고 나를 따라 오너라.”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의 골짜기를 지나는 우리들의 눈에 진흙을 이겨 발라주시면서 주님의 은혜를 마음에 담아주시고, 주님의 은총을 몸에 새겨 주시어 온전한 믿음,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교회가 실로암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십남”의 눈에 진흙을 발라주시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말씀하셨고, 사십남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면 보면, 괄호를 치고 그 안에도 실로암이란 연못의 이름을 설명합니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요한10:7)

10
성지순례를 하다보면, 방문하게 되는 장소가 기대 이상이어서 감동하는 때도 있지만 기대 이하여서 많이 실망하게 되는 곳도 있는데, 실망하게 되는 곳 중에 한 곳이 실로암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연못일까? 기대했지만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웅장하지 않고, 아름답지도 않고, 연못이란 이름을 붙이기조차 민망합니다. 지금은 그렇지만 성서 속에 실로암은, 실로암에 담겨 있는 이야기는, 실로암이란 이름에 담겨 있는 뜻은 참 복되고 아름답습니다.

실로암은 천연적인 연못이 아니고, 만들어진 연못입니다.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계곡 위에는 기혼이란 샘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생명줄인 기혼 샘은 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 밖에 있습니다. 평화로울 때는 성문 밖으로 나가서 물을 기를 수 있었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물을 긷기 위하여 성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히스기야 임금이 바위로 된 지하 터널을 파서 수로를 내어 성안으로 끌어들이는데, 기혼 샘이 지하 수로를 통하여 성 안으로 들어와 모인 곳, 그래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샘이 되었던 곳이 실로암 연못이니, 오늘날 교회가 실로암 연못처럼 구원의 우물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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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가장 영화로운 곳, 예루살렘 성전이겠지요, 가장 화려한 곳, 왕궁이겠지요, 가장 험악한 곳 북문 밖 해골이 뒹구는 골고다겠지요, 그리고 가장 낮은 곳, 실로암 연못입니다. 실로암 연못은 가장 낮은 곳에서 생명을 공급하는 물, 씻어서 성결하게 하는 물을 담고 있기에 실로암은 교회의 역할입니다.

교회는 실로암 연못처럼 가장 높은 자리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비우시고 베들레헴 말구유 오셨습니다. 교회는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 물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겸손하여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담고 있어야 하고, 성결하게 하는 물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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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은 실로암을 소개하면서 연못의 위치나 크기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연못의 유래에 대하여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실로암이란 이름의 뜻을 설명합니다. 그 뜻이 무엇이라고요? “보냄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보냈습니다. 누구를요? “사십남”을, “사십남”은 예수님의 보냄을 받고 실로암 연못에 와서 눈을 씻어 밝은 눈이 되었고, 밝은 눈이 된 후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안디옥식구들은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안디옥교회란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곳에서 어두운 눈을 밝아지고, 귀는 열려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습니다. 저는 자로 왔지만 사슴같이 뛰게 되었고, 혀가 풀려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되었고, 찬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광야 같은 우리 마음에는 샘이 솟아 시내가 흐르고, 우리의 삶에는 꽃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사35:5-7) 코로나 골짜기를 지나면서 교회가 세상을 많이 실망시켰지만, 그럼에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뜻은 교회가 실로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를 함께 세워가는 안디옥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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