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나누기

2024. 04.28. 숩의 두 언덕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4-26 11:45
조회
866
제목: 숩의 두 언덕
성경: 사무엘상서 1 : 1 - 8

1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의 몸은 신비롭습니다.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나의 몸은 하나님의 은혜로 넘칩니다. 하나님이 손수 흙으로 빚으시고 숨결을 불어 넣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신 것이 신비롭고,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이 내 심령 속으로 흘러든 것이 은혜롭습니다. 내가 나를 아는데요, 참 더럽고 추합니다. 그럼에도 내 몸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전이라니 신비롭고 은혜롭습니다.

더 신비롭고 은혜로운 것은 내 몸이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께서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사신 것처럼,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사신 것처럼,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신 것처럼 그렇게 영광스러운 몸으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장면을 바꾸어 봅니다. 하나님은 창조사역의 완성으로 가정을 세우셨습니다. 창조사역의 완성으로 왜, 가정을 세우셨을까? 가정은 생명을 담고 있어서 나로 하여금 신비롭고도 은혜로운 몸을 가지고 태어나게 하고, 자라나게 하는 생명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사역의 완성으로 가정을 세우셨다면 구속사역의 완성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구속사역의 완성으로 왜, 교회를 세우셨을까? 교회는 영원한 생명을 담고 있어서 복음이 내게로 흘러들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나의 마음은 주님을 닮아가게 하고, 나의 걸음은 주님을 따라가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이 오면 신령한 몸을 덧입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는 생명자리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주일부터 넉 주간 동안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잇대어 놓으면서, 예수님의 부활에 나의 부활을 연결시켜 놓으면서 내가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서 하늘나라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였다면 오늘부터 석 주간 동안은 나의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는 가정, 창조사역의 완성으로 세우신 가정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3
사무엘상서를 열면 아주 대조적인 두 가정과 마주하게 됩니다. 한 가정은 우리 모두가 본받고 싶은 엘가나의 가정이고, 다른 한 가정은 본받고 싶지 않는 엘리의 가정입니다. 제사장 엘리의 가정에서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태어나고 망나니로 자랍니다. 못된 짓만 골라하더니 가정은 폐문이 되고, 이웃에게는 악한 영향력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게 하는 단초가 됩니다. 그러나 엘가나의 가정에서는 사무엘이 태어나고 자랍니다. 하나님의 등불을 밝히면서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으며 자라더니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마침내 국부의 자리에 오르고, 사무엘의 이름이 성경책에 이름이 됩니다. 사무엘을 길러낸 엘가나의 가정과 홉니와 비느하스를 길러낸 엘리의 가정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4
두 가정의 모습을 살펴보기 전에 엘가나의 가정에서 길러낸 “사무엘”이란 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살펴봅시다. 성경은 사무엘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삼상2:26) 이런 사무엘의 모습이 얼마나 복되었으면 누가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소개할 때 사무엘의 어린 시절을 모티브로 사용을 합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2:52)

사무엘이 성장하여 사사로 등장하는 그 자리를 저와 함께 가보십시다. 백성들의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을 등지고 바알과 아스다롯에게로 향합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이스라엘은 불레셋의 압박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법궤까지 전쟁터로 끌고 나갔는데, 법궤는 빼앗기고 이스라엘은 참담한 패배를 맛봅니다.

이런 국가적인 위기에서 사무엘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을 합니다.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읍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등 뒤로 던져 버리고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물을 길러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붓고 회개합니다. “여호와여! 우리가 범죄 하였나이다.” 금식하며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소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불레셋 군대에게 큰 우레를 발하십니다. 블레셋 군대는 혼비백산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승리의 기념비를 세우는데, “에벤에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나이다.”

5
사무엘의 마지막 설교가 압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고별설교를 합니다. “여러분, 저의 머리가 백발이 되었습니다. 제가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여러분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왕이 있으니 왕이 여러분을 지도할 것입니다. 저는 이제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려고 합니다. 혹시 제가 여러분을 다스리면서 누구의 것을 빼앗은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누구를 속인 일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누구를 억울하게 한 일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뇌물을 받고 잘못한 재판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갚아드리겠습니다.”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당신은 우리를 속인 적이 없습니다. 억압하신 일도 없습니다. 무엇 하나 빼앗은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깨끗한 마음으로 우리를 지도하였고, 온전한 삶을 살았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표합니다.” 이렇게 사무엘의 시작은 복되고, 삶의 여정 하나 하나는 아름답고, 인생의 끝맺음이 영광스럽습니다. 그렇게 복될 수 있는 것, 사무엘이 자란 가정에 그 열쇠가 그려져 있습니다.

6
오늘 설교의 제목을 주보에서 보신 분들이 “목사님, 오타가 있습니다. ‘숩’이라고 발음하지만 ‘ㅂ’이 아니고 ‘ㅍ’입니다. ‘숲의 두 언덕’을 ‘숩의 두 언덕’이라고 잘못 쓰셨네요.”라고 말씀하실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는데요, 맞게 썼습니다. 1절 말씀에 보면 사무엘의 아버지인 엘가나는 소개하면서, 그 분이 누구의 후손인지, 어느 마을에 살고 있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엘가나의 아버지는 ‘여로함’이고, 할아버지는 ‘엘리후’이고, 증조부는 ‘도후’이고, 고조부는 ‘숩’입니다.

엘가나가 살던 마을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라마다임소빔”입니다. “라마다임소빔”이란 “두 언덕, ‘숩’이란 분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두 언덕”이란 뜻입니다. 엘가나의 집이 두 언덕 사이에 있었던 것처럼 사무엘이 자란 가정에는 아버지 “엘가나”라는 언덕과 어머니 “한나”라는 언덕이 있어서 복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아버지 “엘가나”라는 언덕 아래서, 기도를 드리는 어머니 “한나”라는 언덕 아래서 사무엘이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석 주 동안 사무엘의 가정과 홉니의 가정을 오갈 터인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홉니의 가정에는 예배를 드리는 아버지와 기도를 드리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고, 사무엘의 가정에는 예배를 드리는 아버지와 기도를 드리는 어머니가 복되게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배드리는 아버지입니다.
1
다른 것은 몰라도 “예배”하면, 엘가나보다 엘리가 당연히 앞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엘리는 이스라엘의 최고지도자인 사사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도 아니고 여호와의 성막이 있던 실로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세습제였으니, 그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당연히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를 보십시오. 제사장임에도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행실이 나빴습니다. 행실이 나쁜데 어디까지 나쁜가? 제사장이 예배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2:17) 이렇게 예배를 멸시하는 엘리의 가정을 두고 하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 나면서부터 제사장의 가정이란 복을 받았음에도 예배를 멸시하였고, 예배를 멸시하다가 버림받은 가정이 엘리의 가정입니다.

2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예배를 복되고 귀하게 여깁니다. 예배를 복되고 귀하게 여기는 엘가나의 모습이 오늘 읽은 말씀에 그려져 있습니다. 1장 3절 말씀을 보면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라고 하였습니다. 엘가나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 사람입니다. 예배를 드려야 할 때가 되면 오십 여리 남짓 떨어져 있는 실로, 성막이 있는 실로로 예배를 드리러 올라갑니다. 아내와 함께 모든 자녀들을 데리고 올라갑니다. 예물도 정성껏 준비하여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갑니다. 예배를 드리는 아버지 엘가나의 모습 속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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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입니다. 엘가나의 예배생활을 소개할 때마다 “매년”이란 말이 함께 나옵니다. 3절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 실로에 올라가서” 7절에도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21절에도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어느 한 때만 예배를 드리고 멈춘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만 둔 것이 아닙니다. 예배드리는 때가 돌아오면 일손을 멈추고 성막이 있는 실로로 올라갔습니다.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은 습관이 되어 있는 분이 엘가나입니다.

4
“온 집이 함께”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가 되어 아버지 엘가나가 성막이 있는 실로로 올라갈 때마다 아내와 함께 합니다. 자녀들과 함께 올라갑니다. 온 집안이 함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리고 있는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립니다. 그 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두고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와 애굽 왕 바로가 줄다리기를 합니다. 바로는 사흘 길 광야로 가지 말고 여기에서 예배를 드리랍니다. 어린아이들은 여기에 놓아두고 장정만 가서 예배를 드리랍니다. 제물이 될 소와 양은 놓아두고 사람들만 가서 예배를 드리랍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예배 자리로 나가야겠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빈손으로 갈 수야 없지요 당연히 소도 끌고 가고, 양도 데리고 가겠습니다. 장정만 가서 예배를 드리라니요 아내도, 자녀들도 온 가족이 예배를 드려야겠습니다.

5
예배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엘가나가 예배를 드리러 올라갈 때면 예물을 준비합니다. 수소를 끌고 가고, 항아리에 고운 밀가루를 넣어가고, 가죽 부대에 포도주를 담아갑니다. 제물 중에 하나님의 것을 성별하고, 제사장의 몫을 구분하고, 가족에게 돌아갈 분깃을 아내인 한나에게 주고 브닌나에게도 줍니다. 자녀들에게도 줍니다. 분깃을 받고도 한나가 슬퍼하자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픕니까?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습니까?” 예배 자리에서 은혜를 나누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회복하였습니다. 예배 자리에서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30:11) 찬송을 불렀습니다. 사무엘의 가정에 예배를 드리는 아버지의 복된 언덕이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가정에는 예배의 아름다운 언덕이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기도드리는 어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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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서 앞부분에는 사무엘이 나고 자란 엘가나의 가정과 망나니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나고 자란 엘리의 가장이 나란히 그려져 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엘리의 가정에는 엘리의 아내, 홉니와 비느하스의 어머니 모습이 조금도 언급되지 않는 것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엘리의 아내, 홉니와 비느하스의 어머니가 있었을 텐데 성경 속에는 전혀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엘가나의 가정에는 한나가 엘가나의 아내로 등장하고, 아내를 넘어 사무엘의 어머니로 아름답게 그려지는데 기도드리는 어머니, 기도하는 어머니를 넘어 찬송을 드리는 어머니, 찬송을 드리는 어머니를 넘어 기도와 찬송으로 작은 겉옷을 지어서 아들에게 입히는 어머니로 등장을 합니다. 오늘은 예배드리는 아버지와 짝을 이루는 기도드리는 어머니로서 한나를 소개하겠습니다.

2
한나는 기도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한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좋은 남편은 있는데, 집안 살림은 넉넉한데, 몸도 건강한데, 온 집안이 신앙생활도 잘하는데, 자식이 없는 것입니다. 한나가 살던 당시 자식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났다는 증거였습니다. 한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의 자리에 엎드립니다.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생각하소서.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오면 그의 평생을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삼상1:11) 문제가 없는 가정, 어려움이 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그러니 한나의 가정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문제와 어려움은 기도제목이 되었고, 기도제목은 하나님 앞에서 찬송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쏟아내는 기도였습니다. 한나가 기도하는 모습을 엘리 제사장이 지켜봅니다.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를 하였습니다. “자네가 언제까지 취해 있겠는가? 당장 포도주를 끊으라.”(삼상1:14) 한나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저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였습니다. 저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 나의 심정을, 나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낸 것뿐입니다.”(삼상1:15) 심정을 토하는, 마음을 쏟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마음을 쏟아놓으면 쏟아놓은 마음에 주님의 손이 얹어집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형편을 펼쳐놓으면 펼쳐놓은 형편에도 주님의 손이 얹어집니다.

3
기도 응답에 감사하고 찬양하였습니다. 한나의 기도가 응답되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짓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내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다.”(삼상1:20)는 뜻입니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서원한대로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던 날 이런 찬송을 드립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술이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나이다.”

기도를 드리는 어머니로 인하여 사무엘은 평생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기도의 사람, 사무엘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 기도 쉬는 것을 죄로 생각하였으니, 그 삶의 얼마나 복되고 능력 있고 풍성하였겠습니까? 이렇게 사무엘이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 기도하는 어머니 한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사무엘이 태어나고 자란 가정에는 복된 두 언덕이 있었습니다. 예배드리는 아버지 엘가나가 하나의 언덕이었고, 기도드리는 어머니 한나가 또 하나의 언덕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에 연결되어 있는 가정에도 “라마다임” 복된 두 언덕, 예배드리는 아버지의 언덕, 기도드리는 어머니의 언덕이 있는 복된 가정으로 세워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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