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31.(부활주일) 의심을 넘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3-29 12:05
조회
766
제목: 의심을 넘어
성경: 누가복음 24 : 8 - 12
1
누가의 직업이 의사여서 그런지, 첫 번째 부활절 이야기를 펼치는데, 세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아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제가 설명을 드려 볼 터이니, 여러분은 마음에다 세 폭의 그림을 그려보십시오. 첫 번째 그림은 부활절 새벽,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입니다.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서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부활의 복된 소식을 전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 분이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누가24:5-6)
두 번째 그림은 부활절 오후, 엠마오로 가는 길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두 제자와 동행하십니다. 성경을 풀어주시며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 떡을 떼어주시며 눈을 밝게 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두 제자는 곧바로 일어나 단숨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뵈었습니다.”(누가24:34)
세 번째 그림은 부활절 밤, 예루살렘 다락방입니다. 손수 제자의 발을 씻겨 주시던 그 다락방, 성찬을 제정하여 교회 안에 보물로 담아 놓으시던 그 다락방,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방문을 걸어 잠근 그 다락방에 부활의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부활의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시어 평강을 선포하심에도, 제자들은 유령으로 생각하여 무서워합니다. 주님은 유령이 아니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을 확인시켜 주시려고, 못 자국 난 손을 펼쳐 보여주십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이 믿지 못하자,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물으셨고, 제자들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내어드렸고,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운 생선을 잡수셨고, 제자들의 마음은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으로 가득하였습니다.(누가24:41)
2
첫 번째 부활절 이야기를 세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마주하였는데, 세 폭의 그림을 나란히 놓아보십시오. 세 폭의 그림은 시간을 달리합니다. 동이 트는 새벽에서 해가 기울어 가는 오후로, 오후에서 해가 저문 밤으로 시간을 달리합니다. 뿐만 아니라 펼쳐지는 이야기의 무대도 다릅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루살렘 다락방으로 무대를 달리합니다. 시간과 장소를 달리할 뿐만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등장하는 인물이 다릅니다. 그날 새벽,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는 주님을 사랑하였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날 오후, 엠마오로 가는 길에는 주님을 따랐던 두 제자가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예루살렘 다락방에는 도마를 제외한 사도들이 등장을 합니다.
세 폭의 그림은 시간을 달리하고, 장소를 달리하고, 등장하는 인물을 달리하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 이야기의 구성, 구조가 같습니다. 부활 소식이 전해지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부활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탄한 이야기로 생각하여 의심합니다. 의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넘어 부활을 확인하면서 기쁨이 넘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3
그러면 확인을 해 보십시다. 부활절 새벽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부어드리기 위해서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여인들 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은 굴려져 있었고, 무덤 속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근심하며 두려워하는 여인들 앞에 찬란한 옷을 입은 천사가 나타났고,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 분이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부활소식을 전합니다.
무덤에서 돌아온 여인들은 사도들에게 비어 있는 무덤과 천사가 전해준 부활 소식을 알립니다. 그 때 사도의 반응을 보십시오. 여인들의 한 말을 어떤 이야기로 듣습니다. 뜬 구름을 잡는 허탄한 이야기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의심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몇 번이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을 반복해서 말씀하셨음에도 믿지 않고 의심합니다. 그런데 의심을 넘어서는 분이 있습니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빈 무덤에 놓여 있는 세마포를 확인합니다.
4
세 폭의 그림은 시간을 달리하고, 장소를 달리하고, 등장하는 인물을 달리하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 이야기의 구성, 구조가 같습니다. 부활 소식이 전해지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부활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탄한 이야기로 생각을 하여 의심합니다. 의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넘어 부활을 확인하면서 기쁨이 넘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면 확인을 해 보십시다. 부활절 오후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여인들이 전하는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베드로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도저히 믿어지지를 않습니다. 마음의 의심은 얼굴에 슬픈 빛이 되었고, 마음의 의심은 허탈한 걸음이 되어서 저물어가는 엠마오로 향합니다.
그 길에 누가 찾아옵니까? 부활의 주님께서 찾아오시어 책망하며 꾸짖으십니다. “미련한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성경에 약속한 말씀을 더디 믿는 사람들이라.”고 꾸짖으십니다. 꾸짖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약속되어 있는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시니, 제자들의 마음을 뜨거워집니다. 떡을 떼어주시니, 눈을 밝게 하십니다. 의심을 넘어 뜨거운 마음이 되고, 의심을 넘어 밝은 눈이 되니 부활의 주님을 뵙게 되었고,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뵈었습니다.”
5
세 폭의 그림은 시간을 달리하고, 장소를 달리하고, 등장하는 인물을 달리하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 이야기의 구성, 구조가 같습니다. 부활 소식이 전해지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부활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탄한 이야기로 생각을 하여 의심합니다. 의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넘어 부활을 확인하면서 기쁨이 넘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면 확인을 해 보십시다. 부활절 밤입니다. 예루살렘 다락방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시어 평강을 선포하심에도 놀라움과 무서움으로 가득합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 가득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마주 하면서도 유령으로, 귀신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몸으로 부활하신 것임을 일러주기 위해서 이런 설명을 하십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가 보는 것처럼 살과 뼈가 있느니라.” 주님은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못 자국 난 손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운 생선을 잡수시면서 영이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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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부활절 새벽에도, 오후에도, 밤에도 부활의 소식이 전해지지만 첫 반응은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러했으니, 우리들도 부활 소식을 접할 때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는 것, 어쩌면 당연할지 모릅니다. 예수님과 삼년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도 의심하고 있으니,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의심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의 부활에 대하여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은 의심을 넘어서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예나 지금이나 과학적인 증거로 증명할 수 있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적인 영역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지식으로 이해가 되고, 논리적으로 들어맞는 이성적인 영역이 아니고 신앙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예수님 안에 있는 나도 부활한다는 신앙은 자연적의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영역이 아니고 자연현상을 초월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과학의 영역, 이성의 영역, 자연의 영역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고, 과학과 이성과 자연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부활신앙도 신앙의 대상이고, 믿음의 영역입니다.
7
말씀을 이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으로 다시 들어가 보십시다. 다락방에는 발을 씻어주시는 섬김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고, 주님의 살과 피로 주님의 식탁이 차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장면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이웃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이 아름답지만 그것에 멈추면 컵에 물을 절반쯤 채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의 식탁에 앉아서 주님과 연합의 신비를 이루고 성도들이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거룩하지만 거기에서 멈추면 컵에 물을 삼분지 이쯤 채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컵에 물이 가득히 채워지는 순간이 있는데, 예루살렘 다락방에서와 같이 부활신앙이 의심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고, 예수 안에 있는 나도 부활의 날이 있음을 믿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신앙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의심을 넘어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 누가복음 24 : 8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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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의 직업이 의사여서 그런지, 첫 번째 부활절 이야기를 펼치는데, 세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아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제가 설명을 드려 볼 터이니, 여러분은 마음에다 세 폭의 그림을 그려보십시오. 첫 번째 그림은 부활절 새벽,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입니다.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서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부활의 복된 소식을 전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 분이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누가24:5-6)
두 번째 그림은 부활절 오후, 엠마오로 가는 길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두 제자와 동행하십니다. 성경을 풀어주시며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 떡을 떼어주시며 눈을 밝게 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두 제자는 곧바로 일어나 단숨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뵈었습니다.”(누가24:34)
세 번째 그림은 부활절 밤, 예루살렘 다락방입니다. 손수 제자의 발을 씻겨 주시던 그 다락방, 성찬을 제정하여 교회 안에 보물로 담아 놓으시던 그 다락방,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방문을 걸어 잠근 그 다락방에 부활의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부활의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시어 평강을 선포하심에도, 제자들은 유령으로 생각하여 무서워합니다. 주님은 유령이 아니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을 확인시켜 주시려고, 못 자국 난 손을 펼쳐 보여주십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이 믿지 못하자,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물으셨고, 제자들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내어드렸고,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운 생선을 잡수셨고, 제자들의 마음은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으로 가득하였습니다.(누가2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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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부활절 이야기를 세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마주하였는데, 세 폭의 그림을 나란히 놓아보십시오. 세 폭의 그림은 시간을 달리합니다. 동이 트는 새벽에서 해가 기울어 가는 오후로, 오후에서 해가 저문 밤으로 시간을 달리합니다. 뿐만 아니라 펼쳐지는 이야기의 무대도 다릅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루살렘 다락방으로 무대를 달리합니다. 시간과 장소를 달리할 뿐만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등장하는 인물이 다릅니다. 그날 새벽,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는 주님을 사랑하였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날 오후, 엠마오로 가는 길에는 주님을 따랐던 두 제자가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예루살렘 다락방에는 도마를 제외한 사도들이 등장을 합니다.
세 폭의 그림은 시간을 달리하고, 장소를 달리하고, 등장하는 인물을 달리하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 이야기의 구성, 구조가 같습니다. 부활 소식이 전해지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부활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탄한 이야기로 생각하여 의심합니다. 의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넘어 부활을 확인하면서 기쁨이 넘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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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확인을 해 보십시다. 부활절 새벽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부어드리기 위해서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여인들 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은 굴려져 있었고, 무덤 속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근심하며 두려워하는 여인들 앞에 찬란한 옷을 입은 천사가 나타났고,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 분이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부활소식을 전합니다.
무덤에서 돌아온 여인들은 사도들에게 비어 있는 무덤과 천사가 전해준 부활 소식을 알립니다. 그 때 사도의 반응을 보십시오. 여인들의 한 말을 어떤 이야기로 듣습니다. 뜬 구름을 잡는 허탄한 이야기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의심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몇 번이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을 반복해서 말씀하셨음에도 믿지 않고 의심합니다. 그런데 의심을 넘어서는 분이 있습니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빈 무덤에 놓여 있는 세마포를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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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폭의 그림은 시간을 달리하고, 장소를 달리하고, 등장하는 인물을 달리하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 이야기의 구성, 구조가 같습니다. 부활 소식이 전해지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부활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탄한 이야기로 생각을 하여 의심합니다. 의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넘어 부활을 확인하면서 기쁨이 넘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면 확인을 해 보십시다. 부활절 오후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여인들이 전하는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베드로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도저히 믿어지지를 않습니다. 마음의 의심은 얼굴에 슬픈 빛이 되었고, 마음의 의심은 허탈한 걸음이 되어서 저물어가는 엠마오로 향합니다.
그 길에 누가 찾아옵니까? 부활의 주님께서 찾아오시어 책망하며 꾸짖으십니다. “미련한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성경에 약속한 말씀을 더디 믿는 사람들이라.”고 꾸짖으십니다. 꾸짖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약속되어 있는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시니, 제자들의 마음을 뜨거워집니다. 떡을 떼어주시니, 눈을 밝게 하십니다. 의심을 넘어 뜨거운 마음이 되고, 의심을 넘어 밝은 눈이 되니 부활의 주님을 뵙게 되었고,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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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폭의 그림은 시간을 달리하고, 장소를 달리하고, 등장하는 인물을 달리하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 이야기의 구성, 구조가 같습니다. 부활 소식이 전해지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부활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탄한 이야기로 생각을 하여 의심합니다. 의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넘어 부활을 확인하면서 기쁨이 넘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면 확인을 해 보십시다. 부활절 밤입니다. 예루살렘 다락방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시어 평강을 선포하심에도 놀라움과 무서움으로 가득합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 가득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마주 하면서도 유령으로, 귀신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몸으로 부활하신 것임을 일러주기 위해서 이런 설명을 하십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가 보는 것처럼 살과 뼈가 있느니라.” 주님은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못 자국 난 손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운 생선을 잡수시면서 영이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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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부활절 새벽에도, 오후에도, 밤에도 부활의 소식이 전해지지만 첫 반응은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러했으니, 우리들도 부활 소식을 접할 때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는 것, 어쩌면 당연할지 모릅니다. 예수님과 삼년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도 의심하고 있으니,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의심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의 부활에 대하여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은 의심을 넘어서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예나 지금이나 과학적인 증거로 증명할 수 있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적인 영역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지식으로 이해가 되고, 논리적으로 들어맞는 이성적인 영역이 아니고 신앙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예수님 안에 있는 나도 부활한다는 신앙은 자연적의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영역이 아니고 자연현상을 초월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과학의 영역, 이성의 영역, 자연의 영역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고, 과학과 이성과 자연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부활신앙도 신앙의 대상이고, 믿음의 영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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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이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으로 다시 들어가 보십시다. 다락방에는 발을 씻어주시는 섬김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고, 주님의 살과 피로 주님의 식탁이 차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장면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이웃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이 아름답지만 그것에 멈추면 컵에 물을 절반쯤 채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의 식탁에 앉아서 주님과 연합의 신비를 이루고 성도들이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거룩하지만 거기에서 멈추면 컵에 물을 삼분지 이쯤 채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컵에 물이 가득히 채워지는 순간이 있는데, 예루살렘 다락방에서와 같이 부활신앙이 의심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고, 예수 안에 있는 나도 부활의 날이 있음을 믿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신앙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의심을 넘어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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