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나누기

2024. 02. 25.(주일낮)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2-24 13:53
조회
812
제목: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2)
성경: 마태복음 17: 1- 8

1
지난 주일에 드렸던 말씀, “어느 곳에서 있었던 일입니까?”라고 질문을 드리면 당황스럽겠지요? 한반도의 지붕이 백두산인 것처럼, 성서의 땅인 이스라엘의 지붕은 “헬몬산”이었고, 헬몬산 남쪽 자락에는 헬라시대에 만들어진 도시가 있었는데,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그곳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출발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하였습니다. ①주님은 최고의 칭찬을 하십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마태16:17) ②주님은 최상의 약속을 하십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기 못하리라.”(마태16:18) ③주님은 최고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태16:19)

2
주님은 그곳에서 속마음을 털어놓으십니다. 하늘 보좌를 비우시고 세상에 내려오신 목적,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마태16:21)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비난하고 나선 것입니다. 비난할 뿐만 아니라 “주님! 그리하지 마옵소서.” 간청을 합니다. 간청할 뿐만 아니라 가로막고 나섭니다. “이 일이 결코 주님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 베드로가 온몸으로 막아내겠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꾸짖으시면서, 어떤 사람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는지 분명하게 밝혀 주십니다.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는 사람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향하여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책망하시면서, 어떤 각오가 있어야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는지 분명하게 일러주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3
그 일이 있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까? “엿새 후에”입니다. 어디에서 있었던 일입니까?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제가 마태라면 “높은 산”이라고 쓰지 않고 그 산에 이름을 썼을 터인데, 마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서지리를 연구하시는 분들은 여기에 나오는 “높은 산”이란 갈릴리 호수 서편, 이스르엘 평야 동쪽 끝자락 “엎어 놓은 종” 모양으로 우뚝 솟아 있는 “다볼 산”이라고 추정하는데, 우리는 이 산을 “변화산”이라고,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는, 입으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던 “변화산”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그날의 “변화산”을 저와 함께 올라가 보십시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세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시는데 얼굴은 해같이 빛났고, 옷은 희어져 빛과 같이 눈부셨습니다. 홀연히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가져온 모세가 나타나고,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눕니다.

감동이 된 베드로가 “주님,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주님께 드리고, 하나는 모세에게 드리고,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베드로의 말이 채끝나기도 전에 빛난 구름이 온 산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4
엿새 전, 가이사랴 빌립보, 주님은 어떤 사람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는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엿새 후 주님은 변화 산의 영화로운 모습을 펼치시면서 어떤 사람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가? 기도의 무릎을 꿇는 사람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부활의 영화로움을 소망하는 사람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기도의 무릎으로 걷는 길입니다.(누가9:28-29)
1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담고 있는 복음서가 모두 네 권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입니다. 사 복음서 중에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섬세하게 그려낸 분은 누가입니다. ①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는데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신 것이 마태 마가 누가가 같습니다. ②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난다는 것도 마태 마가 누가가 같습니다. ③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하여 의논하시는 것도 마태 마가 누가가 같습니다. ④온 산이 빛난 구름이 덮이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온 것도 마태 마가 누가가 같습니다.

그런데 누가만의 특색이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신 것, 다른 목적이 아니고 “기도하시기 위해서”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 날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난 것, 다른 것을 하실 때가 아니고 “기도하실 때에” 변모되었다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기도의 무릎으로 걷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2
변화산뿐만 아니라 겟세마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날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드린 기도의 내용인 마태 마가 누가가 같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 간절히 기도를 드리시는데 제자들은 잠을 자는 것, 잠든 제자들을 흔들어 깨우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시는 내용도 마태 마가 누가가 같습니다. 그런데 누가만이 간절히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누가에 의하면 그날 예수님은 힘써 기도하십니다. 힘쓰고 애써 기도하십니다. 힘쓰고 애써 더욱 기도하십니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기도의 무릎으로 걷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3
베드로는 체포된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멀찍이 따라갑니다. 대제사장의 뜰 한 가운데 불이 피워져 있었고, 둘러앉은 사람들 가운데 베드로도 끼어 앉았습니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데, 가장 연약한 사람의 대명사인 계집종 앞에서 부인합니다, 한두 번이 아니고 세 번씩이나 부인합니다. 맹세하면서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할 때 닭이 울었고, 심문을 받으시던 주님의 눈빛이 베드로의 마음에 머물렀고, 베드로는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그리고 통곡하는데 심히 통곡합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이렇게 실족하고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섭니다. 베드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이 어디로부터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가만이 기록한 내용인데요,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넘어진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식사자리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정색을 하고는 “제가 주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주님과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데 무슨 섭섭한 말씀이세요.” 이런 베드로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라.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

무슨 뜻입니까? ①베드로가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지만 닭이 울 때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 것,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②심문 받으시던 주님의 눈빛이 베드로 가슴에 머물 때 자신의 비겁하고 추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③베드로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서 밖으로 뛰쳐나가 심히 통곡할 수 있었던 것,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기도의 무릎으로 걷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4
이번에는 저와 함께 요단강으로 내려가 보십시다. “제가 선생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제가 어떻게 선생님에게 세례를 베풉니까?” 세례 요한은 손사래를 치지만 주님은 요한을 설득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시어 기도를 드리실 때, 하늘이 열립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강림하십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

요단강과 변화산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①시간적으로 요단강 세례는 공생애를 시작할 때이고, 변화산 기도는 공생애를 마무리할 때입니다. ②장소적으로 요단 강의 기도는 가장 낮은 곳, 유대 땅 요르단 강 하류이고, 변화산의 기도는 가장 높은 곳, 갈릴리 땅 변화산 꼭대기입니다. ③그럼에도 두 사건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 기도의 무릎은 펼치셨음을 요단강의 기도가 말하고 있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도 기도의 무릎으로 걷고 있음을 변화산의 기도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걷는 믿음의 길도 기도의 무릎으로 걷는 것입니다.

둘째 부활의 날을 소망하며 걷는 길입니다.(2절)
1
변화산은 참으로 영화롭습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세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을 오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름답고, 모세가 나타나고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의논하시는 장면도 영화롭습니다. 온 산이 빛난 구름으로 가득한 것이 아름답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온 것도 영화롭습니다. 영화로운 모습 중에 압권은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는 것입니다.

2
복음서를 더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얼굴이 해같이 빛나는 영화로운 모습,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모습은 부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고요,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려가기 위해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오른 성도들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는 얼굴이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성도들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옷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 공중으로 끌어 올려 주님을 영접하는 성도의 모습이 해같이 빛나는 얼굴이고, 희어져 광채가 나는 옷입니다.

그러니 어떤 고난과 환난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으십니다. 십자가 너머에는 해같이 빛나는 얼굴이 있고, 희어져 광채가 나는 옷입니다. 어떤 유혹이 있더라고 흔들리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시오.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들의 해같이 빛나는 얼굴이고, 우리들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옷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변화산에 펼쳐 보이시면서 우리 마음에 참된 소망으로 그려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3
그날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서 영화로우신 주님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마음에 소망으로 채웠던 베드로 사도는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 받는 형제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 날의 일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가졌기에 고난 받는 여러분,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신실하신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이 영화로운 몸, 신령한 몸을 덧입게 된다는 것도 교묘하게 지어낸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어떤 몸을 부활하게 되는지를 주님께서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벧후1:16)

그날 저는 주님과 함께 그 산에 있었습니다. 그날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고, 예수님의 옷은 희어져 눈이 부셨습니다. 빛난 구름은 온 산을 덮었고,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그날 주님께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던 것처럼 주님 다시 오시는 날이 오면, 우리들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신령한 몸을 덧입고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벧후1:17)

4
그날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서 영화로우신 주님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던 사도 요한도 같은 증언을 합니다. 밧모 섬에 유배된 요한은 주님의 날, 성령에 감동이 되어 부활의 주님을 뵙게 되는데, 그날 사도 요한이 뵈었던 부활의 주님은 변화산에서 영화롭게 변모되셨던 주님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가지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십니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셨는데, 가슴에 금띠를 띠셨습니다. 머리는 희기가 양털과 같았고, 눈은 불꽃과 같았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처럼 눈부셨습니다.(계1:12-16) 십자가의 길, 그 끝자락에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라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끝자락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영화로움이 있으니 흔들리지 마십시오.

5
우리의 예배를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말씀,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식탁, 성찬입니다. 성찬에는 지난 날 받은 은혜가 담겨 있고, 지금도 받고 있는 은혜가 담겨 있고, 앞으로 받게 될 은혜도 담겨 있습니다. 지난 날 받은 은혜는 무엇입니까? 떡을 찢기신 주님의 몸으로 받고, 잔을 흘리신 보혈로 마실 때,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이 내 심령으로 흘러들면서 죄는 씻어지고, 기쁨의 좋은 날이 온 것입니다. 지금도 받고 있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떡을 찢기신 주님의 몸으로 받으면서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연합의 신비를 이룬 것입니다.

앞으로 받게 될 은혜는 무엇입니까? 떡을 찢기신 주님의 몸을 받고, 잔을 흘리신 보혈로 마시기에 주님 다시 오시는 날, 부활하신 주님의 몸처럼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성찬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고 하였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성찬에 참여한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한지? 변화산에서 주님이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해같이 빛나는 얼굴, 희어져 눈이 부신 옷입니다.

5
말씀을 정리합니다. 변화산의 영화로움을 마음에 그리고 보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기도의 무릎으로 걷는 길이고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걷는 길입니다.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주님과 함께 영화로움에도 참여하는 안디옥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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