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2. 04.(주일낮) 나를 따르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2-03 11:03
조회
966
제목: 나를 따르라
성경: 마태복음 4 : 18 - 22
1
요단강은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화로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시니, 하늘이 열립니다. 성령님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강림하십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오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3:16-17)
영화로운 요단강이 멀어지면서 고난과 시련이 그늘져 있는 유대 광야가 펼쳐집니다. 예수님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고, 마귀가 나타나서 시험을 합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태4:3-4) 마귀는 세 차례나 거듭하여 시험을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시고 또 이기시니, 마귀는 예수님을 떠났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을 듭니다.
2
고난과 시련이 그늘져 있는 유대 광야가 뒤로 물러나면서 새로운 무대가 펼쳐지는데, 새 희망으로 넘치는 갈릴리 호수입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유대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올라오셨고,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를 보시고는,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릅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이번에는 아버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시몬과 안드레처럼 야고보와 요한도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시는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토리를 연결하는 세 가지 동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 중심에 오늘 설교제목인 “나를 따라오라.” 예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따라오라.”는 동사를 중심으로 해서 앞에 나오는 상황이 있고, 뒤에 나오는 상황이 있습니다. 앞에 나오는 동사는 “보시니” 입니다.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입니다. “나를 따라오라.” 뒤에 나오는 동사는 “버려두고”입니다. “곧 그물을 버려두고”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입니다.
첫째 보시고
1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대, 사역을 펼치시던 성서의 땅에서는 학생이 먼저 훌륭한 스승을 찾아갑니다. 무릎을 꿇고, “선생님,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선생님은 찾아온 학생의 인품을 살펴보고, 재능을 알아보고, 학생의 미래를 그려보면서 제자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관례를 뛰어 넘으십니다. 선생님이신 예수님이 먼저 제자 될 사람을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2
성서 속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보시고 찾아오시는, 보시고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음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 것도 보셨습니다. 그리고 찾아오시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은 아담을 부르셨던 하나님은 구원의 첫 걸음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을 떠나 내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1-2)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무거운 짐으로 근심하며 괴로워하는 것을 보셨고, 학대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도 들으셨습니다. 그런 백성을 돌보시려고,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시어 모세를 부르십니다.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라.”(출3:10)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백성들에게 소망을 불어넣기 위하여 그발 강가 있는 에스겔을 부르십니다. 하늘을 여시고, 열린 하늘을 펼쳐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권능을 부어주시면서 마음이 금강석처럼 굳어 있는 이스라엘에게 보내십니다.(겔1:1-3)
3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긴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복의 근원으로 아브라함도 부르십니다. 노예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시고, 절망의 늪에 빠진 포로들에게 해방을 꿈꾸게 하기 위해서 에스겔도 부르십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시던 주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걸으십니다. 두루 다니면서 함께 복음은 전파할, 회당을 찾아가서 함께 백성들을 가르칠, 병든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을 함께 치료할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해서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십니다.
바닷가를 따라 걸어가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를 “보시고”, 조금 더 가시다가 그물을 깁고 있는 요한과 야고보를 “보시고” 라고 하였는데, “보시고”라는 단어가 “주목하여 본다.” “관찰하여 본다.”는 뜻입니다. 어쩌다 우연히 눈에 들어와서 보게 되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스쳐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난 겉모습을 살필 뿐만 아니라 속에 감추어져 있는 마음과 성품과 기질까지 살펴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날 주님은 갈릴리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온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 해변을 따라 걸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소일거리로 아침 산책을 위해서 해변을 따라 걸어가신 것도 아닙니다. 시몬과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를 제자로 부르실 목적을 가지고 해변을 따라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와 안드레의 모습을 보셨는데, 열심히 그물을 던지는, 고기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고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의 겉모습을 보실 뿐만 아니라 안드레의 성품과 기질까지 보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물을 깁는 요한과 야고보를 보셨는데,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정겨운 모습, 숙련된 기술로 그물을 깁는 모습을 보실 뿐만 아니라 요한의 지나온 길도 보시고, 야고보 함께 펼쳐갈 앞날까지 보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4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주님께서 오늘 예배자로 서 있는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함을 얻는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는 하늘 백성으로,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시는데, 어쩌다가 우연치 않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주목하여 보시고 부르신 것처럼, 야고보와 요한을 관찰하여 보시고 부르신 것처럼 저도 부르시고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성품과 기질까지 보시고 부르신 것이고, 우리들을 향한 거룩한 목적과 놀라온 계획을 가지시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여기까지 진행되면 이런 의심이 듭니다. “다른 분들은 그렇게 보시고 부르셨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닌가봐, 아무래도 하나님이 실수를 하셨지, 내가 나를 아는데 나는 불량품이거든, 못된 내 마음 내가 알고, 그릇된 습관 내가 알고, 내 삶의 더러운 흔적을 내가 아는데, 하나님이 실수하셨나봐” 그런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허물로 얼룩져 있는 것 씻어서 쓰고,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 채워서 쓰고, 굽고 어그러져 있는 것 바로잡아 쓰고, 예전에 실수 했던 것 거울삼아 앞으로 복되게 사용하시겠답니다.” 허물이 있음에도, 상처와 약점이 있음에도 나를 보시고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안디옥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5
“보는 눈 듣는 귀 깨닫는 마음”이란 주제를 가지고 2024년도 대심방을 공식적으로는 은혜가운데 마쳤습니다. 심방을 준비하면서 기도했던 내용이 있는데, “성도들의 가정에서 찬송을 부를 때 주님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시고, 말씀을 선포할 때 생명의 씨앗이 되어 마음 밭에 뿌려지게 하시고, 기도를 드릴 때 이른 비와 같은 은혜를 내려주세요.” 어느 집사님의 가정에서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차를 대접받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집사님이 이런 질문을 하세요.
“목사님, 저는 권사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권사가 될 수 있나요. 저는 권사가 되고 싶은데, 어떤 자격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나요?” 집사님의 물음에는 진심이 담겨 있어요. 얼굴에도 눈빛에도 진심이 담겨 있어요. 제가 무엇이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그래요.” 그리고는 집사님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는 것이 그날 저의 대답이었습니다.
교리와 장정에 보면 권사의 자격이 나옵니다. “집사로 선출되고, 5년 이상 그 직임을 연임한 30세 이상 된 이” “기도회를 인도하고, 다른 이에게 신앙적으로 권면할 능력이 있는 이” “감리교회에서 제정한 권사과정고시에 합격한 이” 그런데 이런 자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권사님이 되려면 온 집안 식구가 믿음 생활을 해고요, 교회에서 드리는 모든 공적인 예배에 참석을 해야 하고요, 소득의 십일조를 드려야 하고요, 교회에서 직임을 맡아서 섬겨야 하고요,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에 향기가 있어서 다른 분들에게 선한 영향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격에 대해서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집사님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어 넘겼는데, 이 시간에 분명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집사님은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신 것처럼 주목하여 부르시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것처럼 관찰하여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선한 목적을 가지고 부르시고, 야고보와 요한처럼 거룩한 소망을 가지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부르셨으니, 지금 집사님으로 쓰임을 받은 것이 은혜이고, 때가 되면 권사님으로 은혜의 옷을 입혀 또 사용하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보시고 부르신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버려두고
1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요한과 야고보를 보시고 부르시니, 요한과 야고보도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버려두고”는 소유권을 포기하고, 사용권도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어부로 살아가려면 꼭 필요한 것이 배이고 그물인데, 그 소유권과 사용권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직 포기하지 못해서 힘겨워하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2
새해 첫 번째 주일에도 만났던 사람인데요, 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젊은이는 세상에 좋은 조건을 다 갖춘 사람입니다. 젊음이 있는데 부자입입니다. 부자인데 고위 관료입니다. 고위 관료인데 마땅히 지켜야할 복된 계명을 잘 알고 있었고, 잘 알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그 계명을 지켜왔습니다. 무엇하나 흠잡을 것이 없는데 영생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오기까지 한 것입니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너는 나를 따르라.” 젊은이는 근심을 하는데 심히 근심을 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예수님을 떠나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것이 성서 속에 그려져 있는 한 젊은이의 씁쓸한 뒷모습입니다.(누가18:18-27)
3
젊은이가 씁쓸한 뒷모습을 남긴 채 예수님을 떠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인 “여리고”에 살고 있었습니다. 돈이 많은 부자이긴 했지만 세리였기에 멸시와 천대도 받아야 했습니다. 키가 작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을 뵙고 싶어 하는 열망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던 날, 무슨 이유에서인지 삭개오는 늦게 거리로 나왔습니다. 길 양편으로 많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기에 키가 작은 삭개오는 주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뵙고 싶은 열망은 삭개오를 돌감람나무 위로 끌어 올립니다. 그런 삭개오의 마음을 주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으시고, 그런 삭개오의 모습을 외면하실 주님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걸음을 멈추셨고, 삭개오를 우러러 보셨고, “삭개오야!” 이름을 불려주셨고,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주님을 자신의 집에 모신 삭개오는 “버려두고”를 합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처럼, 요한이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처럼 삭개오도 “버려두고”를 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었는데 이제는 내 삶의 목적이 주님입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목표란 것을 이루는 것이 내 삶의 방법이었는데 이제는 과정을 올바르고도 선하게 하겠습니다.
4
신약성경 중에 히브리서가 있습니다.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히브리인들이 지키던 구약의 제사제도가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완벽하게 완성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된 책인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권면으로 편지를 열고, “예수님을 바라보자.”고는 권면으로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따라가려고 하면 예수님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되, 항상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려면 먼저 내 몸에서 벗어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발에서 끊어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뽑아서 던져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과 2절 말씀에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농사를 지어보면 좋은 곡식 사이에서 잡초도 함께 자라는데, 잡초는 한 번 뽑아주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른 봄에도 잡초는 돋아나고, 무더운 한 여름에도 잡초는 자라납니다. 가을이 되었음에도 잡초는 돋아나고 자라납니다. 서리가 내리고야 끝이 납니다.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무거운 짐, 벗어놓아야 할 얽매이는 줄, 뽑아내야 할 악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다.(롬12:21) 성찬을 받기 전에 모든 무겁게 하는 악과 나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성찬을 받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4 : 18 - 22
1
요단강은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화로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시니, 하늘이 열립니다. 성령님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강림하십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오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3:16-17)
영화로운 요단강이 멀어지면서 고난과 시련이 그늘져 있는 유대 광야가 펼쳐집니다. 예수님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고, 마귀가 나타나서 시험을 합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태4:3-4) 마귀는 세 차례나 거듭하여 시험을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시고 또 이기시니, 마귀는 예수님을 떠났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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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시련이 그늘져 있는 유대 광야가 뒤로 물러나면서 새로운 무대가 펼쳐지는데, 새 희망으로 넘치는 갈릴리 호수입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유대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올라오셨고,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를 보시고는,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릅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이번에는 아버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시몬과 안드레처럼 야고보와 요한도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시는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토리를 연결하는 세 가지 동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 중심에 오늘 설교제목인 “나를 따라오라.” 예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따라오라.”는 동사를 중심으로 해서 앞에 나오는 상황이 있고, 뒤에 나오는 상황이 있습니다. 앞에 나오는 동사는 “보시니” 입니다.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입니다. “나를 따라오라.” 뒤에 나오는 동사는 “버려두고”입니다. “곧 그물을 버려두고”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입니다.
첫째 보시고
1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대, 사역을 펼치시던 성서의 땅에서는 학생이 먼저 훌륭한 스승을 찾아갑니다. 무릎을 꿇고, “선생님,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선생님은 찾아온 학생의 인품을 살펴보고, 재능을 알아보고, 학생의 미래를 그려보면서 제자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관례를 뛰어 넘으십니다. 선생님이신 예수님이 먼저 제자 될 사람을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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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속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보시고 찾아오시는, 보시고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음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 것도 보셨습니다. 그리고 찾아오시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은 아담을 부르셨던 하나님은 구원의 첫 걸음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을 떠나 내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1-2)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무거운 짐으로 근심하며 괴로워하는 것을 보셨고, 학대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도 들으셨습니다. 그런 백성을 돌보시려고,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시어 모세를 부르십니다.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라.”(출3:10)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백성들에게 소망을 불어넣기 위하여 그발 강가 있는 에스겔을 부르십니다. 하늘을 여시고, 열린 하늘을 펼쳐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권능을 부어주시면서 마음이 금강석처럼 굳어 있는 이스라엘에게 보내십니다.(겔1:1-3)
3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긴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복의 근원으로 아브라함도 부르십니다. 노예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시고, 절망의 늪에 빠진 포로들에게 해방을 꿈꾸게 하기 위해서 에스겔도 부르십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시던 주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걸으십니다. 두루 다니면서 함께 복음은 전파할, 회당을 찾아가서 함께 백성들을 가르칠, 병든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을 함께 치료할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해서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십니다.
바닷가를 따라 걸어가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를 “보시고”, 조금 더 가시다가 그물을 깁고 있는 요한과 야고보를 “보시고” 라고 하였는데, “보시고”라는 단어가 “주목하여 본다.” “관찰하여 본다.”는 뜻입니다. 어쩌다 우연히 눈에 들어와서 보게 되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스쳐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난 겉모습을 살필 뿐만 아니라 속에 감추어져 있는 마음과 성품과 기질까지 살펴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날 주님은 갈릴리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온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 해변을 따라 걸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소일거리로 아침 산책을 위해서 해변을 따라 걸어가신 것도 아닙니다. 시몬과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를 제자로 부르실 목적을 가지고 해변을 따라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와 안드레의 모습을 보셨는데, 열심히 그물을 던지는, 고기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고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의 겉모습을 보실 뿐만 아니라 안드레의 성품과 기질까지 보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물을 깁는 요한과 야고보를 보셨는데,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정겨운 모습, 숙련된 기술로 그물을 깁는 모습을 보실 뿐만 아니라 요한의 지나온 길도 보시고, 야고보 함께 펼쳐갈 앞날까지 보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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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주님께서 오늘 예배자로 서 있는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함을 얻는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는 하늘 백성으로,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시는데, 어쩌다가 우연치 않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주목하여 보시고 부르신 것처럼, 야고보와 요한을 관찰하여 보시고 부르신 것처럼 저도 부르시고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성품과 기질까지 보시고 부르신 것이고, 우리들을 향한 거룩한 목적과 놀라온 계획을 가지시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여기까지 진행되면 이런 의심이 듭니다. “다른 분들은 그렇게 보시고 부르셨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닌가봐, 아무래도 하나님이 실수를 하셨지, 내가 나를 아는데 나는 불량품이거든, 못된 내 마음 내가 알고, 그릇된 습관 내가 알고, 내 삶의 더러운 흔적을 내가 아는데, 하나님이 실수하셨나봐” 그런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허물로 얼룩져 있는 것 씻어서 쓰고,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 채워서 쓰고, 굽고 어그러져 있는 것 바로잡아 쓰고, 예전에 실수 했던 것 거울삼아 앞으로 복되게 사용하시겠답니다.” 허물이 있음에도, 상처와 약점이 있음에도 나를 보시고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안디옥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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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눈 듣는 귀 깨닫는 마음”이란 주제를 가지고 2024년도 대심방을 공식적으로는 은혜가운데 마쳤습니다. 심방을 준비하면서 기도했던 내용이 있는데, “성도들의 가정에서 찬송을 부를 때 주님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시고, 말씀을 선포할 때 생명의 씨앗이 되어 마음 밭에 뿌려지게 하시고, 기도를 드릴 때 이른 비와 같은 은혜를 내려주세요.” 어느 집사님의 가정에서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차를 대접받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집사님이 이런 질문을 하세요.
“목사님, 저는 권사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권사가 될 수 있나요. 저는 권사가 되고 싶은데, 어떤 자격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나요?” 집사님의 물음에는 진심이 담겨 있어요. 얼굴에도 눈빛에도 진심이 담겨 있어요. 제가 무엇이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그래요.” 그리고는 집사님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는 것이 그날 저의 대답이었습니다.
교리와 장정에 보면 권사의 자격이 나옵니다. “집사로 선출되고, 5년 이상 그 직임을 연임한 30세 이상 된 이” “기도회를 인도하고, 다른 이에게 신앙적으로 권면할 능력이 있는 이” “감리교회에서 제정한 권사과정고시에 합격한 이” 그런데 이런 자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권사님이 되려면 온 집안 식구가 믿음 생활을 해고요, 교회에서 드리는 모든 공적인 예배에 참석을 해야 하고요, 소득의 십일조를 드려야 하고요, 교회에서 직임을 맡아서 섬겨야 하고요,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에 향기가 있어서 다른 분들에게 선한 영향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격에 대해서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집사님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어 넘겼는데, 이 시간에 분명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집사님은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신 것처럼 주목하여 부르시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것처럼 관찰하여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선한 목적을 가지고 부르시고, 야고보와 요한처럼 거룩한 소망을 가지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부르셨으니, 지금 집사님으로 쓰임을 받은 것이 은혜이고, 때가 되면 권사님으로 은혜의 옷을 입혀 또 사용하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보시고 부르신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버려두고
1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요한과 야고보를 보시고 부르시니, 요한과 야고보도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버려두고”는 소유권을 포기하고, 사용권도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어부로 살아가려면 꼭 필요한 것이 배이고 그물인데, 그 소유권과 사용권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직 포기하지 못해서 힘겨워하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2
새해 첫 번째 주일에도 만났던 사람인데요, 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젊은이는 세상에 좋은 조건을 다 갖춘 사람입니다. 젊음이 있는데 부자입입니다. 부자인데 고위 관료입니다. 고위 관료인데 마땅히 지켜야할 복된 계명을 잘 알고 있었고, 잘 알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그 계명을 지켜왔습니다. 무엇하나 흠잡을 것이 없는데 영생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오기까지 한 것입니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너는 나를 따르라.” 젊은이는 근심을 하는데 심히 근심을 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예수님을 떠나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것이 성서 속에 그려져 있는 한 젊은이의 씁쓸한 뒷모습입니다.(누가18:18-27)
3
젊은이가 씁쓸한 뒷모습을 남긴 채 예수님을 떠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인 “여리고”에 살고 있었습니다. 돈이 많은 부자이긴 했지만 세리였기에 멸시와 천대도 받아야 했습니다. 키가 작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을 뵙고 싶어 하는 열망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던 날, 무슨 이유에서인지 삭개오는 늦게 거리로 나왔습니다. 길 양편으로 많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기에 키가 작은 삭개오는 주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뵙고 싶은 열망은 삭개오를 돌감람나무 위로 끌어 올립니다. 그런 삭개오의 마음을 주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으시고, 그런 삭개오의 모습을 외면하실 주님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걸음을 멈추셨고, 삭개오를 우러러 보셨고, “삭개오야!” 이름을 불려주셨고,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주님을 자신의 집에 모신 삭개오는 “버려두고”를 합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처럼, 요한이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처럼 삭개오도 “버려두고”를 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었는데 이제는 내 삶의 목적이 주님입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목표란 것을 이루는 것이 내 삶의 방법이었는데 이제는 과정을 올바르고도 선하게 하겠습니다.
4
신약성경 중에 히브리서가 있습니다.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히브리인들이 지키던 구약의 제사제도가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완벽하게 완성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된 책인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권면으로 편지를 열고, “예수님을 바라보자.”고는 권면으로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따라가려고 하면 예수님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되, 항상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려면 먼저 내 몸에서 벗어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발에서 끊어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뽑아서 던져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과 2절 말씀에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농사를 지어보면 좋은 곡식 사이에서 잡초도 함께 자라는데, 잡초는 한 번 뽑아주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른 봄에도 잡초는 돋아나고, 무더운 한 여름에도 잡초는 자라납니다. 가을이 되었음에도 잡초는 돋아나고 자라납니다. 서리가 내리고야 끝이 납니다.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무거운 짐, 벗어놓아야 할 얽매이는 줄, 뽑아내야 할 악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다.(롬12:21) 성찬을 받기 전에 모든 무겁게 하는 악과 나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성찬을 받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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