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5. 21.(주일낮) 와서 조반을 먹으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3-05-19 11:42
조회
1158
제목: 와서 조반을 먹으라.
성경: 요한 21 : 9 - 14
1
오늘 읽은 말씀은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물고기 잡으러 가자고 제안하였고, 6명의 제자들은 따라나섰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갈릴리 바다 속을 손바닥 보듯 하는 제자들인데, 그 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채 새날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호숫가 언덕 위에 서신 부활의 주님께서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셨고, 제자들은 “없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주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습니다.
호숫가에 서신 분이 부활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제자는 요한입니다. 주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던, 주님의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했던 요한이 “주님이시다.” 외쳤습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 행동하는 제자는 베드로였습니다.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호수로 뛰어내립니다. 그리고는 주님께로 향합니다.
2
제자들이 호숫가에 배를 대고 보니, 주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숯불을 피우셨습니다. 숯불 위에 생선을 올려놓으셨고, 떡도 굽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주님은 둘러앉는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나누어주시고, 구운 생선도 그렇게 하십니다.
저는 오늘 읽은 말씀에서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하나는 그 날 아침 조반의 메뉴입니다. 주님은 왜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으로 조반을 준비하셨을까? 다른 하나는 조반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제자들은 위하여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으로 조반을 준비하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첫째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입니다.
1
2023년, 주일낮예배 요한복음을 교회력에 맞추어 읽고 있는데, 요한복음에는 의미 있는, 뜻이 담긴 식탁을 베푸시는 주님을 자주 만나 뵙게 됩니다. 갈릴리 지역 “가나”라 이름 하는 마을에 혼인잔치가 펼쳐졌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를 받았습니다. 잔치가 무르익어 가는데 마리아가 주님을 찾아오더니,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자네가 어떻게 좀 해보야 하지 않겠는가?” 기쁨의 잔치는 멈추어야 하고, 손님을 초대한 신랑과 신부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만든 포도주를 맛본 사람들은 즐거워하면서 신랑을 칭찬합니다. “처음 포도주보다 나중 포도주가 더 맛이 있구려.”
예수님께서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시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나타나셨고, 이 광경을 지켜본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가 기다리던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하구나.”(요한2:11)
2
예수님은 병든 사람을 고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모여온 사람들은 고침을 받으면서, 천국복음을 마음에 담으면서 해가 저무는 줄도, 배가 고픈 줄로 몰랐습니다. 빈 들녘 해는 이미 기울었고, 제자들의 전대도 텅 비어 있었기에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그때 한 아이가 보리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 왔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드리십시다.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니 5천명이 배부르게 먹었고, 남은 부스러기를 거두니 열두 광주리였습니다. 그날 주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한6:51)
3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던 밤,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큰 다락방”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한 유월절 식탁에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져 감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받아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니라.” 식후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돌려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받아 마시라. 이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린바 새 언약의 피니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여라.”
이렇게 성찬을 제정하시어 교회 안에 보물로 담아놓으셨기에 오늘도 우리는 떡을 찢기신 주님의 몸으로 받으면서, 잔을 흘리신 주님의 보혈로 마시면서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합니다. 오늘도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을 기뻐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우리의 삶을 하늘에 잇대어 놓습니다.
4
이렇게 갈릴리 가나 혼인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벳세다 빈 들녘을 오병이어로 채우시고, 예루살렘 마가다락방에서 주님의 식탁을 제정하시더니, 이번에는 갈릴리 호숫가에다 숯불을 피우십니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밤새도록 그물을 내린 제자들의 몸을 녹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허기진 제자들을 위하여 조반을 준비하시는데, 떡을 굽고 생선도 구우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둘러앉은 제자들에게 손수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고, 생선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 날 아침 햇살 가득히 퍼짐같이 주님의 사랑은 제자들의 몸을 녹였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조반의 메뉴가 왜 하필이면 생선과 떡일까? 궁합이 맞는 음식이 있다는데, 보리떡과 구운 생선은 아침 식사로는 최상일까요? 주님은 어제 저녁 보리떡을 미리 준비하셨고, 생선은 그날 아침 호수에서 건져 올린 신토불이의 음식이기 때문일까? 3년 동안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동고동락을 하였는데, 제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떡과 생선이었을까? 왜 하필이면 떡과 생선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의 조반에는 어떤 음식이 오릅니까? 어릴 때는 무쇠 솥이 걸린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짓다보니, 두께는 다르지만 누룽지는 항상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조반을 드신 후 숭늉을 꼭 잡수셨는데, 저는 숭늉을 먹지 않고, 냉수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버지의 아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얼마 전부터 숭늉이 먹고 싶은데 전기밥솥으로는 여의치 않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아예 조반으로 구수한 누룽지를 끓여 먹습니다. 저의 조반 메뉴가 누룽지인 것처럼 예수님도 누룽지를 들고 오셔서 숯불 위에 냄비를 걸고, 누룽지 부수어 넣고, 호숫가 물을 담아다 끓이면 괜찮았을 것 같은데, 왜 생선과 떡일까?
5
생선에는 찢어지지 않는 그물이 담겨 있습니다. 그날 부활의 주님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이에 제자들은 던졌고,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물을 배 위로 끌어올릴 수 없어서, 바닷가에서 끌어올리니, 그물에 가득 찬 큰 물고기가 모두 153마리였는데,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설명하는 것입니까? 큰 물고기 153마리가 걸린 그물을 끌어올리면 당연히 그물이 찢어져야 합니다. 지금처럼 화학섬유로 만든 그물이 아니고, 식물성 섬유로 그물을 만들던 시대였기에 153마리의 물고기면 그물이 찢어져야 자연스러운 일인데,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요한21:11)⇭
찢어지지 않는 그물에 끌려온 물고기, 그 물고기 몇 마리를 숯불에 구워 조반으로 먹으면서 이런 믿음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면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구나.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면 다함이 없는 열매를 맺는구나.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면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고, 독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는구나.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면 찢어지지 않는 그물이 되는구나.
6
생선에 찢어지지 않는 그물이 그려져 있다면 숯불에 구운 떡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주님이 부활하신 후, 교회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일에 모였습니다. 교회가 주일에 모여서 하는 일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은 조반을 준비하셨던 것처럼 떡을 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처음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음식을 먹고,”(행2:46) 떡을 찢기신 주님의 몸으로 떼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말씀에 보면, 바울이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일에 모였습니다. 모였을 때 한 일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떡을 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말씀을 강론하는 것입니다.(행20:7)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주일에 모일 때마다 교회는 말씀의 떡을 떼고, 성찬의 떡을 떼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그날 조반 메뉴로 숯불에 생선과 숯불에 구운 떡을 올려놓으셨습니다. 주님의 날, 말씀의 떡을 받고, 성찬의 떡을 떼면서, 갈릴리 호숫가 주님이 친히 준비하는 조반에 여러분의 모습을 그려 넣는 은혜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조반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1
지금까지는 조반 메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에는 조반을 준비하신 주님의 마음을 살펴봅니다. 그 날 조반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날 조반을 준비하신 목적이 무엇일까? 물론 언 몸을 녹여주시기 위해서, 허기진 배를 채워주시기 위한 것이 조반을 준비하신 목적의 전부일까? 아니 그 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베드로와 제자들을 다시 세워주시려는 긍휼의 마음이 주님이 준비하신 조반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2
이사야선지자는 “고난 받은 종의 노래” 4편을 통하여 오실 메시야, 그의 성품이 어떠하신지, 그 분이 펼치실 사역이 무엇인지, 그 분이 펼치실 사역에 맺힐 열매가 무엇인지를 풍성하게 펼치시는데, 첫 번째 노래를 통하여 그 분의 성품을 일러줍니다. “그 분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꺼져가는 등불은 어떻습니까? 등잔에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심지가 타들어가면서 불꽃은 사그라들고, 끄름이 나오면서 매캐한 냄새를 풍깁니다. “후∽”하고 미련 없이 꺼버려야 하는 것이 꺼져가는 등불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십니다. 다시 기름을 채우고, 심지를 손질하여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3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예배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바리새인들이 한 쪽 손이 마른 사람을 회당 가운데 세우고는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이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그른 일입니까?”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몰라서 예수님의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낚기 위해서 한손 마른 불쌍한 사람을 미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책잡고, 넘어뜨리기 위해서 올무 속에 먹잇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경건해야 할 회당 안에서, 그것도 다른 날과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안식일에 말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계략을 다 아셨습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침으로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도 넉넉히 예상하셨습니다. 그러나 한편 손 마른 사람의 힘겨운 삶, 고통스러운 삶을 보셨고, 긍휼히 여기셨고, 마른 손을 치료하여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가 오시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고 하셨는데 이 분이 바로 그 분이시구나!”
4
베드로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밤 예수님은 체포되었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래도 베드로인지라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러갈 때, “멀찍이에서” 이긴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갔고, “멀리 떨어져서” 이긴 하지만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다. 구경꾼의 자리에서 모닥불을 쬐고 있을 때,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대명사인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이 아니고 세 번씩이나 부인합니다. 그냥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맹세하면서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심문 받으시는 주님께서 뒤를 돌아보시니, 베드로와 눈이 마주칩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말씀이 생각났고, 밖으로 뛰쳐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부인한 것, 베드로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세 번 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것, 베드로에게는 버티기 힘겨운 큰 부담이었습니다.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 앞을 향하여 나가야 하는 베드로의 발목을 채우는 족쇄였습니다.
5
베드로가 “상한 갈대”인데, 내버려두실 리가 없으시지요? 베드로가 “꺼져가는 등불”로 내버려두실 리가 없으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갈릴리 호숫가 언덕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 호숫가에 숯불을 피우시고 조반을 준비하시는 것, 떡을 떼어 나누어주고 생선도 그렇게 하시는 것,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씩이나 반복하시면서 물으시는 것,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세 번씩이나 반복하시면서 사역을 맡기시는 것,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불러주시고, 다시 일으켜 주시고, 다시 세워주시는 과정이었습니다.
6
호숫가의 식탁과 빼어 닮은 식탁이 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 식탁입니다. 엘리야는 탈진하여 로뎀나무 아래 쓰러졌고, “하나님,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은 것이 낫겠습니다.” 그런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시어 어루만져 주십니다. 한 병 물과 숯불에 구운 떡으로 식탁을 준비하십니다. 엘리야는 그 음식의 힘에 의지하여 40주 40야 광야를 횡단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릅니다.
안디옥식구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서 주일낮예배가 로뎀나무 아래의 식탁이고, 갈릴리 호숫가의 조반이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의 떡을 떼면서 찢어지지 않는 그물이 되시고, 성찬의 떡을 떼면서 새롭게 회복되어 광야를 횡단하는 은혜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 요한 21 : 9 - 14
1
오늘 읽은 말씀은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물고기 잡으러 가자고 제안하였고, 6명의 제자들은 따라나섰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갈릴리 바다 속을 손바닥 보듯 하는 제자들인데, 그 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채 새날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호숫가 언덕 위에 서신 부활의 주님께서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셨고, 제자들은 “없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주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습니다.
호숫가에 서신 분이 부활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제자는 요한입니다. 주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던, 주님의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했던 요한이 “주님이시다.” 외쳤습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 행동하는 제자는 베드로였습니다.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호수로 뛰어내립니다. 그리고는 주님께로 향합니다.
2
제자들이 호숫가에 배를 대고 보니, 주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숯불을 피우셨습니다. 숯불 위에 생선을 올려놓으셨고, 떡도 굽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주님은 둘러앉는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나누어주시고, 구운 생선도 그렇게 하십니다.
저는 오늘 읽은 말씀에서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하나는 그 날 아침 조반의 메뉴입니다. 주님은 왜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으로 조반을 준비하셨을까? 다른 하나는 조반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제자들은 위하여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으로 조반을 준비하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첫째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입니다.
1
2023년, 주일낮예배 요한복음을 교회력에 맞추어 읽고 있는데, 요한복음에는 의미 있는, 뜻이 담긴 식탁을 베푸시는 주님을 자주 만나 뵙게 됩니다. 갈릴리 지역 “가나”라 이름 하는 마을에 혼인잔치가 펼쳐졌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를 받았습니다. 잔치가 무르익어 가는데 마리아가 주님을 찾아오더니,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자네가 어떻게 좀 해보야 하지 않겠는가?” 기쁨의 잔치는 멈추어야 하고, 손님을 초대한 신랑과 신부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만든 포도주를 맛본 사람들은 즐거워하면서 신랑을 칭찬합니다. “처음 포도주보다 나중 포도주가 더 맛이 있구려.”
예수님께서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시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나타나셨고, 이 광경을 지켜본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가 기다리던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하구나.”(요한2:11)
2
예수님은 병든 사람을 고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모여온 사람들은 고침을 받으면서, 천국복음을 마음에 담으면서 해가 저무는 줄도, 배가 고픈 줄로 몰랐습니다. 빈 들녘 해는 이미 기울었고, 제자들의 전대도 텅 비어 있었기에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그때 한 아이가 보리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 왔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드리십시다.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니 5천명이 배부르게 먹었고, 남은 부스러기를 거두니 열두 광주리였습니다. 그날 주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한6:51)
3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던 밤,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큰 다락방”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한 유월절 식탁에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져 감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받아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니라.” 식후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돌려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받아 마시라. 이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린바 새 언약의 피니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여라.”
이렇게 성찬을 제정하시어 교회 안에 보물로 담아놓으셨기에 오늘도 우리는 떡을 찢기신 주님의 몸으로 받으면서, 잔을 흘리신 주님의 보혈로 마시면서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합니다. 오늘도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을 기뻐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우리의 삶을 하늘에 잇대어 놓습니다.
4
이렇게 갈릴리 가나 혼인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벳세다 빈 들녘을 오병이어로 채우시고, 예루살렘 마가다락방에서 주님의 식탁을 제정하시더니, 이번에는 갈릴리 호숫가에다 숯불을 피우십니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밤새도록 그물을 내린 제자들의 몸을 녹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허기진 제자들을 위하여 조반을 준비하시는데, 떡을 굽고 생선도 구우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둘러앉은 제자들에게 손수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고, 생선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 날 아침 햇살 가득히 퍼짐같이 주님의 사랑은 제자들의 몸을 녹였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조반의 메뉴가 왜 하필이면 생선과 떡일까? 궁합이 맞는 음식이 있다는데, 보리떡과 구운 생선은 아침 식사로는 최상일까요? 주님은 어제 저녁 보리떡을 미리 준비하셨고, 생선은 그날 아침 호수에서 건져 올린 신토불이의 음식이기 때문일까? 3년 동안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동고동락을 하였는데, 제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떡과 생선이었을까? 왜 하필이면 떡과 생선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의 조반에는 어떤 음식이 오릅니까? 어릴 때는 무쇠 솥이 걸린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짓다보니, 두께는 다르지만 누룽지는 항상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조반을 드신 후 숭늉을 꼭 잡수셨는데, 저는 숭늉을 먹지 않고, 냉수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버지의 아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얼마 전부터 숭늉이 먹고 싶은데 전기밥솥으로는 여의치 않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아예 조반으로 구수한 누룽지를 끓여 먹습니다. 저의 조반 메뉴가 누룽지인 것처럼 예수님도 누룽지를 들고 오셔서 숯불 위에 냄비를 걸고, 누룽지 부수어 넣고, 호숫가 물을 담아다 끓이면 괜찮았을 것 같은데, 왜 생선과 떡일까?
5
생선에는 찢어지지 않는 그물이 담겨 있습니다. 그날 부활의 주님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이에 제자들은 던졌고,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물을 배 위로 끌어올릴 수 없어서, 바닷가에서 끌어올리니, 그물에 가득 찬 큰 물고기가 모두 153마리였는데,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설명하는 것입니까? 큰 물고기 153마리가 걸린 그물을 끌어올리면 당연히 그물이 찢어져야 합니다. 지금처럼 화학섬유로 만든 그물이 아니고, 식물성 섬유로 그물을 만들던 시대였기에 153마리의 물고기면 그물이 찢어져야 자연스러운 일인데,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요한21:11)⇭
찢어지지 않는 그물에 끌려온 물고기, 그 물고기 몇 마리를 숯불에 구워 조반으로 먹으면서 이런 믿음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면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구나.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면 다함이 없는 열매를 맺는구나.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면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고, 독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는구나.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면 찢어지지 않는 그물이 되는구나.
6
생선에 찢어지지 않는 그물이 그려져 있다면 숯불에 구운 떡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주님이 부활하신 후, 교회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일에 모였습니다. 교회가 주일에 모여서 하는 일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은 조반을 준비하셨던 것처럼 떡을 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처음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음식을 먹고,”(행2:46) 떡을 찢기신 주님의 몸으로 떼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말씀에 보면, 바울이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일에 모였습니다. 모였을 때 한 일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떡을 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말씀을 강론하는 것입니다.(행20:7)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주일에 모일 때마다 교회는 말씀의 떡을 떼고, 성찬의 떡을 떼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그날 조반 메뉴로 숯불에 생선과 숯불에 구운 떡을 올려놓으셨습니다. 주님의 날, 말씀의 떡을 받고, 성찬의 떡을 떼면서, 갈릴리 호숫가 주님이 친히 준비하는 조반에 여러분의 모습을 그려 넣는 은혜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조반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1
지금까지는 조반 메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에는 조반을 준비하신 주님의 마음을 살펴봅니다. 그 날 조반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날 조반을 준비하신 목적이 무엇일까? 물론 언 몸을 녹여주시기 위해서, 허기진 배를 채워주시기 위한 것이 조반을 준비하신 목적의 전부일까? 아니 그 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베드로와 제자들을 다시 세워주시려는 긍휼의 마음이 주님이 준비하신 조반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2
이사야선지자는 “고난 받은 종의 노래” 4편을 통하여 오실 메시야, 그의 성품이 어떠하신지, 그 분이 펼치실 사역이 무엇인지, 그 분이 펼치실 사역에 맺힐 열매가 무엇인지를 풍성하게 펼치시는데, 첫 번째 노래를 통하여 그 분의 성품을 일러줍니다. “그 분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꺼져가는 등불은 어떻습니까? 등잔에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심지가 타들어가면서 불꽃은 사그라들고, 끄름이 나오면서 매캐한 냄새를 풍깁니다. “후∽”하고 미련 없이 꺼버려야 하는 것이 꺼져가는 등불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십니다. 다시 기름을 채우고, 심지를 손질하여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3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예배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바리새인들이 한 쪽 손이 마른 사람을 회당 가운데 세우고는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이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그른 일입니까?”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몰라서 예수님의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낚기 위해서 한손 마른 불쌍한 사람을 미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책잡고, 넘어뜨리기 위해서 올무 속에 먹잇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경건해야 할 회당 안에서, 그것도 다른 날과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안식일에 말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계략을 다 아셨습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침으로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도 넉넉히 예상하셨습니다. 그러나 한편 손 마른 사람의 힘겨운 삶, 고통스러운 삶을 보셨고, 긍휼히 여기셨고, 마른 손을 치료하여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가 오시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고 하셨는데 이 분이 바로 그 분이시구나!”
4
베드로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밤 예수님은 체포되었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래도 베드로인지라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러갈 때, “멀찍이에서” 이긴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갔고, “멀리 떨어져서” 이긴 하지만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다. 구경꾼의 자리에서 모닥불을 쬐고 있을 때,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대명사인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이 아니고 세 번씩이나 부인합니다. 그냥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맹세하면서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심문 받으시는 주님께서 뒤를 돌아보시니, 베드로와 눈이 마주칩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말씀이 생각났고, 밖으로 뛰쳐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부인한 것, 베드로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세 번 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것, 베드로에게는 버티기 힘겨운 큰 부담이었습니다.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 앞을 향하여 나가야 하는 베드로의 발목을 채우는 족쇄였습니다.
5
베드로가 “상한 갈대”인데, 내버려두실 리가 없으시지요? 베드로가 “꺼져가는 등불”로 내버려두실 리가 없으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갈릴리 호숫가 언덕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 호숫가에 숯불을 피우시고 조반을 준비하시는 것, 떡을 떼어 나누어주고 생선도 그렇게 하시는 것,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씩이나 반복하시면서 물으시는 것,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세 번씩이나 반복하시면서 사역을 맡기시는 것,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불러주시고, 다시 일으켜 주시고, 다시 세워주시는 과정이었습니다.
6
호숫가의 식탁과 빼어 닮은 식탁이 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 식탁입니다. 엘리야는 탈진하여 로뎀나무 아래 쓰러졌고, “하나님,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은 것이 낫겠습니다.” 그런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시어 어루만져 주십니다. 한 병 물과 숯불에 구운 떡으로 식탁을 준비하십니다. 엘리야는 그 음식의 힘에 의지하여 40주 40야 광야를 횡단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릅니다.
안디옥식구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서 주일낮예배가 로뎀나무 아래의 식탁이고, 갈릴리 호숫가의 조반이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의 떡을 떼면서 찢어지지 않는 그물이 되시고, 성찬의 떡을 떼면서 새롭게 회복되어 광야를 횡단하는 은혜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