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8(주일) - 수로보니게 여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9-07 14:27
조회
2291
제목: 수로보니게 여인
성경: 마가복음 7 : 24 - 30
1
지난주일 오후예배, 샬롬찬양대의 찬양이 은혜롭고 감동이었습니다.
낯익은 곡인 “Amazing Grace” 였지만, 찬양대원의 마음이 담겨 있고 찬양을 부르는 모습이
아주 진지하고 악보도 펼쳐들고 있지도 않아서 참 좋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 찬송은 미국 전통 멜로디입니다. 그리고 작사하신 분은 존 뉴튼(J.Newton)이란
유명한 영국 목사님입니다. 그 목사님이 남긴 이야기 가운데 전 세계인이 알고
우리 모두도 들어본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저는 세 가지 사실 때문에
놀랄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천국에서 꼭 볼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이 없는 것에 놀라고,
둘째는 내가 천국에서 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에 놀라고,
셋째는 내가 천국, 그곳에 있다는 것에 놀랄 것입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2
뉴튼목사님의 이야기가 천국에서 펼쳐지기 전, 이미 복음서 속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칭찬 받을 것 같았던 사람들은 책망을 받고, 은혜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났던
사람들이 도리어 은혜를 덧입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만났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당시 평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분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존경을 표하였는데
예수님은 책망을 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이여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도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책망을 받는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은혜를 덧입습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을 보면 “네 믿음이 크도다.” 칭찬하실 뿐만 아니라 더러운 귀신에 들린
어린 딸도 치유해 주십니다. 이 여인의 믿음이 어떠하였기에 주님은 칭찬을 하시고,
남다른 은혜를 받으면서 복음서 속에 아름답게 등장을 하는 것일까요?
첫째 환경을 믿음으로 넘어섭니다.
1
교회 이름은 예배당이 위치한 지역 이름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예루살렘에 있어서 예루살렘교회이고, 안디옥이란 신흥도시에 세워져서 안디옥교회입니다.
로마에 있어서 로마교회이고, 빌립보에 있어서 빌립보교회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처음 전해질 때는 예배당이 있는 도시나 마을,
지역 이름이 자연스럽게 교회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시화되면서 한 도시에 여러 교회가 세워지다보니 교회가 추구하는 목표나
펼치고자 하는 중점 사역이 교회 이름이 되었습니다. 우리 지방에도 분당교회가 있는가 하면,
만나교회, 불꽃교회, 모퉁이돌교회, 은혜의 교회, 보배로운 교회, 푸른교회가 있습니다.
김혁교전도사님는 푸른교회로 부임을 하셨는데 부임하자마자 교회 이름을 “숨 쉬는 교회”로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입니다. 인천가족공원에서 윤정원 집사님의 장례를 마치고,
서울외곽 순환도로를 타기 위하여 송내인터체인지로 향하는데, 특이한 교회 간판을 읽었습니다.
“담 트고 길 닦는 교회” 입니다. 교회 이름 치고는 좀 길고 낯설고 신기했지만 의미는 괜찮습니다.
“복음으로 막힌 담은 헐고, 복음으로 예수님에게 나가는 길은 닦고”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에 “담 트고 길 닦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2
오늘 성경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높고 견고한 담 밖에 밀려나 있었습니다.
워낙 높아서 넘을 수 없는, 워낙 견고하여서 허물 수도 없는 성 밖에 밀려난 사람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만났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문 안의 사람들이라면 수로보니게 여인은 문 밖의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란 이름의 뜻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유대인들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성경구절이 수놓아진 옷을 입었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사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일주일이며 이틀은 반드시 금식을 하였고, 십일조를 드리는데 고추 열 개를 따면 한 개까지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람들도 바리새인들을 존경하였고, 바리새인 스스로도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나 정도는 해야지!”라고 자부심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책망하였던 율법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직업입니다. 가죽 두루마리에 율법을 적어서 율법 책을 만드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율법을 해석하고,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한 가운데,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갈릴리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정죄하였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높고 견고한 성 안에 사람들입니다.
문 안의 사람들입니다. 울타리 안의 사람들입니다.
3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성문 밖으로, 은혜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사람입니다.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여권이 신장되고, 아들을 낳는 것보다 딸을 낳는 것을
더 좋아하는 시대이지만 2,000년 전 성서의 무대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세 가지를 감사하였습니다.
첫째는 이방인이 아니고 유대인인 것을 감사하였고,
둘째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였고,
셋째는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여자로 태어났으니, 은혜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여자로 태어나되 수로보니게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수로보니게”란 “수리아”와 “베니게”의 합성어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어둠의 땅으로 여기는 수리아지역에,
유대인들이 개처럼 천하게 여기는 페니키아인의 후예로 태어났으니 은혜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결혼을 하였고, 딸도 낳았습니다. 젖을 먹여 기르면서 참 행복했고,
아침마다 머리를 빗겨 단장하며 기뻤습니다. 고운 딸의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면서
즐거워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딸이 악한 귀신에 들린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테고,
험악한 짓을 일삼으면서 무너져 내리는 어린 딸을 지켜내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가니,
은혜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것입니다.
4
이런 수로보니게 여인을 위하여 예수님은 먼저 성문 밖으로 나오십니다. 높고 견고한 성벽을 넘으십니다.
갈릴리에서 사역을 펼치시던 주님께서 두로 땅으로 시돈 땅으로 올라오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손을 잡아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놓여 있는 울타리를 무너뜨립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쌓여 있는
높은 벽도 허물어 버립니다.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는 가시덤불도 걷어냅니다.
어려운 조건이나 환경을 믿음으로 넘어서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립니다. 그리고 간청합니다.
“주님, 내 딸에게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 주십시오.”
5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만 장벽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에도 여러 장벽이 있습니다.
나의 신체적인 약함, 내 성품의 모남, 내 경제적인 형편, 내 가정의 약점, 인간관계의 갈등이 걸림돌이 되고,
가시덤불이 되고, 높은 장벽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넘어서는 것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입니다.
벽을 넘어서는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안디옥 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시험을 믿음으로 통과합니다.
1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대하시는 모습을 보면 “이 양반이 예수님은 맞나?”
어떻게 이토록 심한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실 수 있으실까? 어떻게 사람의 자존심을
이토록 밟아 놓으실 수가 있으실까? 고개를 가로 짓게 됩니다. 편견을 가진 예수님의 모습이,
자존심을 짓밟는 예수님의 모습이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5장에 좀 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2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 일행을 뒤쫓아 오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에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나이다.” 소리, 소리 지르시는데
예수님은 묵묵부답입니다. 간절히 부르짖는데도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식입니다.
제자들이 민망했나 봅니다. “선생님, 민원을 해결하셔야지요. 저토록 간절히 부르짖는데
무엇이라고 답변을 하셔야지요.” 그제 서야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는데, 말씀을 안 하시는 것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
이방인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합니다. 여인의 마음을 후벼 파는 말씀입니다.
3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향하여 침을 뱉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님 앞으로 나가서 무릎을 꿇습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세요.”
그러면 예수님이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라도 주셔야 하는데 도리어 여인의 자존심을 짓밟으십니다.
무시를 하십니다.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린 여인을 향하여 개라는 것입니다. 어둠 밤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개라는 것입니다.
여인의 상처 난 자존심에 소금을 뿌린 것입니다.
4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에게는 인종적인 편견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존심을 짓밟고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결코 그러실 분이 아니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테스트하시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려운 환경을 믿음으로 넘어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시험도 믿음으로 통과합니다.
묵묵부답이라는 무거운 장벽을 믿음으로 넘어섭니다. 자존심에 덥힌 가시덤불도 걷어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벽을 넘고, 믿음으로 가시덤불을 걷어냈을 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때로부터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은
더러운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이 펼쳐졌습니다.
성서 속에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으로 자리매김하여 믿음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안디옥 식구 여러분, 벽을 넘고 가시덤불을 걷어내는 믿음으로 오늘 성찬에 참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1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려운 환경을 믿음으로 넘어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시험도 믿음으로 통과합니다.
환경을 넘어서는 믿음, 시험을 통과하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금 갈릴리에서 두로 땅에 오신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가 되신다는 믿음,
지금 제자들과 함께 두로 땅을 지나고 계신 나사렛 예수께서 주님이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2
수로보니게 여인의 칭찬받는 믿음을 살펴보기 위해서 장면을 바꾸어봅니다.
여리고 성문 밖 “바디매오”의 이야기입니다. 바디매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기에 길거리에 버려진 인생입니다.
여리고 성문 밖에서 구걸하는 하찮은 인생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리고 성문 밖의 분위기가 다른 날과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나사렛 예수가 지나신다.” 바디매오가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은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바디매오를 데려오라 명하십니다. 그리고 바디매오를 향하여 묻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누가18:35-43)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한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3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것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라는 말에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 목수 요셉의 아들,
즉 사람이신 예수님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란 말에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세주, 메시야라는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메시야이신 그분이 오시면 “소경의 눈은 밝아지고, 귀머거리의 귀는 열리고,
저는 자는 사슴과 같이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게 되는” 메시야 되심이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고백 속에 담겨 있습니다.
4
수로보니게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렛 예수로 바라보았다면 더러운 귀신들린 문제를
예수님에게로 가져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신 나사렛 예수로만 바라보았다면
예수님께서 묵묵부답이실 때 침을 뱉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인종적인 차별을 하시고,
자존심을 짓밟을 때 욕설을 퍼붓고 떠나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을 사람이신 나사렛 예수를 넘어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이신 메시야로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에 들렸나이다.”(마태15:22)
예수님을 주님으로,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마음을 후벼 팜에도 “주여 저를 도와주세요.”(마태15:25) 예수님을 여전히 주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개무시를 당함에도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이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태15:27)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으로 가시울타리를 걷어내고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이 성찬에 참여하는 안디옥식구들의 믿음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7 : 24 - 30
1
지난주일 오후예배, 샬롬찬양대의 찬양이 은혜롭고 감동이었습니다.
낯익은 곡인 “Amazing Grace” 였지만, 찬양대원의 마음이 담겨 있고 찬양을 부르는 모습이
아주 진지하고 악보도 펼쳐들고 있지도 않아서 참 좋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 찬송은 미국 전통 멜로디입니다. 그리고 작사하신 분은 존 뉴튼(J.Newton)이란
유명한 영국 목사님입니다. 그 목사님이 남긴 이야기 가운데 전 세계인이 알고
우리 모두도 들어본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저는 세 가지 사실 때문에
놀랄 것입니다. 첫째는 내가 천국에서 꼭 볼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이 없는 것에 놀라고,
둘째는 내가 천국에서 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에 놀라고,
셋째는 내가 천국, 그곳에 있다는 것에 놀랄 것입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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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튼목사님의 이야기가 천국에서 펼쳐지기 전, 이미 복음서 속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칭찬 받을 것 같았던 사람들은 책망을 받고, 은혜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났던
사람들이 도리어 은혜를 덧입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만났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당시 평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분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존경을 표하였는데
예수님은 책망을 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이여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도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책망을 받는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은혜를 덧입습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을 보면 “네 믿음이 크도다.” 칭찬하실 뿐만 아니라 더러운 귀신에 들린
어린 딸도 치유해 주십니다. 이 여인의 믿음이 어떠하였기에 주님은 칭찬을 하시고,
남다른 은혜를 받으면서 복음서 속에 아름답게 등장을 하는 것일까요?
첫째 환경을 믿음으로 넘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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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름은 예배당이 위치한 지역 이름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예루살렘에 있어서 예루살렘교회이고, 안디옥이란 신흥도시에 세워져서 안디옥교회입니다.
로마에 있어서 로마교회이고, 빌립보에 있어서 빌립보교회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처음 전해질 때는 예배당이 있는 도시나 마을,
지역 이름이 자연스럽게 교회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시화되면서 한 도시에 여러 교회가 세워지다보니 교회가 추구하는 목표나
펼치고자 하는 중점 사역이 교회 이름이 되었습니다. 우리 지방에도 분당교회가 있는가 하면,
만나교회, 불꽃교회, 모퉁이돌교회, 은혜의 교회, 보배로운 교회, 푸른교회가 있습니다.
김혁교전도사님는 푸른교회로 부임을 하셨는데 부임하자마자 교회 이름을 “숨 쉬는 교회”로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입니다. 인천가족공원에서 윤정원 집사님의 장례를 마치고,
서울외곽 순환도로를 타기 위하여 송내인터체인지로 향하는데, 특이한 교회 간판을 읽었습니다.
“담 트고 길 닦는 교회” 입니다. 교회 이름 치고는 좀 길고 낯설고 신기했지만 의미는 괜찮습니다.
“복음으로 막힌 담은 헐고, 복음으로 예수님에게 나가는 길은 닦고”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에 “담 트고 길 닦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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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높고 견고한 담 밖에 밀려나 있었습니다.
워낙 높아서 넘을 수 없는, 워낙 견고하여서 허물 수도 없는 성 밖에 밀려난 사람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만났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문 안의 사람들이라면 수로보니게 여인은 문 밖의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란 이름의 뜻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유대인들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성경구절이 수놓아진 옷을 입었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사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일주일이며 이틀은 반드시 금식을 하였고, 십일조를 드리는데 고추 열 개를 따면 한 개까지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람들도 바리새인들을 존경하였고, 바리새인 스스로도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나 정도는 해야지!”라고 자부심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책망하였던 율법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직업입니다. 가죽 두루마리에 율법을 적어서 율법 책을 만드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율법을 해석하고,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한 가운데,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갈릴리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정죄하였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높고 견고한 성 안에 사람들입니다.
문 안의 사람들입니다. 울타리 안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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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성문 밖으로, 은혜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사람입니다.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여권이 신장되고, 아들을 낳는 것보다 딸을 낳는 것을
더 좋아하는 시대이지만 2,000년 전 성서의 무대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세 가지를 감사하였습니다.
첫째는 이방인이 아니고 유대인인 것을 감사하였고,
둘째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였고,
셋째는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여자로 태어났으니, 은혜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여자로 태어나되 수로보니게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수로보니게”란 “수리아”와 “베니게”의 합성어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어둠의 땅으로 여기는 수리아지역에,
유대인들이 개처럼 천하게 여기는 페니키아인의 후예로 태어났으니 은혜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결혼을 하였고, 딸도 낳았습니다. 젖을 먹여 기르면서 참 행복했고,
아침마다 머리를 빗겨 단장하며 기뻤습니다. 고운 딸의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면서
즐거워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딸이 악한 귀신에 들린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테고,
험악한 짓을 일삼으면서 무너져 내리는 어린 딸을 지켜내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가니,
은혜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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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수로보니게 여인을 위하여 예수님은 먼저 성문 밖으로 나오십니다. 높고 견고한 성벽을 넘으십니다.
갈릴리에서 사역을 펼치시던 주님께서 두로 땅으로 시돈 땅으로 올라오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손을 잡아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놓여 있는 울타리를 무너뜨립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쌓여 있는
높은 벽도 허물어 버립니다.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는 가시덤불도 걷어냅니다.
어려운 조건이나 환경을 믿음으로 넘어서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립니다. 그리고 간청합니다.
“주님, 내 딸에게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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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에게만 장벽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에도 여러 장벽이 있습니다.
나의 신체적인 약함, 내 성품의 모남, 내 경제적인 형편, 내 가정의 약점, 인간관계의 갈등이 걸림돌이 되고,
가시덤불이 되고, 높은 장벽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넘어서는 것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입니다.
벽을 넘어서는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안디옥 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시험을 믿음으로 통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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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대하시는 모습을 보면 “이 양반이 예수님은 맞나?”
어떻게 이토록 심한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실 수 있으실까? 어떻게 사람의 자존심을
이토록 밟아 놓으실 수가 있으실까? 고개를 가로 짓게 됩니다. 편견을 가진 예수님의 모습이,
자존심을 짓밟는 예수님의 모습이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5장에 좀 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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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 일행을 뒤쫓아 오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에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나이다.” 소리, 소리 지르시는데
예수님은 묵묵부답입니다. 간절히 부르짖는데도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식입니다.
제자들이 민망했나 봅니다. “선생님, 민원을 해결하셔야지요. 저토록 간절히 부르짖는데
무엇이라고 답변을 하셔야지요.” 그제 서야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는데, 말씀을 안 하시는 것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
이방인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합니다. 여인의 마음을 후벼 파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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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향하여 침을 뱉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님 앞으로 나가서 무릎을 꿇습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세요.”
그러면 예수님이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라도 주셔야 하는데 도리어 여인의 자존심을 짓밟으십니다.
무시를 하십니다.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린 여인을 향하여 개라는 것입니다. 어둠 밤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개라는 것입니다.
여인의 상처 난 자존심에 소금을 뿌린 것입니다.
4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에게는 인종적인 편견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존심을 짓밟고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결코 그러실 분이 아니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테스트하시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려운 환경을 믿음으로 넘어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시험도 믿음으로 통과합니다.
묵묵부답이라는 무거운 장벽을 믿음으로 넘어섭니다. 자존심에 덥힌 가시덤불도 걷어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벽을 넘고, 믿음으로 가시덤불을 걷어냈을 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때로부터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은
더러운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이 펼쳐졌습니다.
성서 속에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으로 자리매김하여 믿음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안디옥 식구 여러분, 벽을 넘고 가시덤불을 걷어내는 믿음으로 오늘 성찬에 참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1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려운 환경을 믿음으로 넘어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시험도 믿음으로 통과합니다.
환경을 넘어서는 믿음, 시험을 통과하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금 갈릴리에서 두로 땅에 오신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가 되신다는 믿음,
지금 제자들과 함께 두로 땅을 지나고 계신 나사렛 예수께서 주님이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2
수로보니게 여인의 칭찬받는 믿음을 살펴보기 위해서 장면을 바꾸어봅니다.
여리고 성문 밖 “바디매오”의 이야기입니다. 바디매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기에 길거리에 버려진 인생입니다.
여리고 성문 밖에서 구걸하는 하찮은 인생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리고 성문 밖의 분위기가 다른 날과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나사렛 예수가 지나신다.” 바디매오가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은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바디매오를 데려오라 명하십니다. 그리고 바디매오를 향하여 묻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누가18:35-43)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한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3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것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라는 말에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 목수 요셉의 아들,
즉 사람이신 예수님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란 말에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세주, 메시야라는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메시야이신 그분이 오시면 “소경의 눈은 밝아지고, 귀머거리의 귀는 열리고,
저는 자는 사슴과 같이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게 되는” 메시야 되심이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고백 속에 담겨 있습니다.
4
수로보니게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렛 예수로 바라보았다면 더러운 귀신들린 문제를
예수님에게로 가져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신 나사렛 예수로만 바라보았다면
예수님께서 묵묵부답이실 때 침을 뱉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인종적인 차별을 하시고,
자존심을 짓밟을 때 욕설을 퍼붓고 떠나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을 사람이신 나사렛 예수를 넘어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이신 메시야로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에 들렸나이다.”(마태15:22)
예수님을 주님으로,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마음을 후벼 팜에도 “주여 저를 도와주세요.”(마태15:25) 예수님을 여전히 주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개무시를 당함에도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이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태15:27)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으로 가시울타리를 걷어내고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이 성찬에 참여하는 안디옥식구들의 믿음이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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